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올려다 보면

역사가 보인다


글, 사진. 김일녀
제공. 문화재청


01.jpg
 

집에도 이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집주인의 이름을 넣어 '누구누구네 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렇게 하는 것은 집의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니다.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름은 곧 존재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집의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현판이다. 옛 건물을 보면 누구나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건물의 정중앙 처마 아래에 현판이 달렸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떄 그 이름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현판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이름을 짓듯 신중하다. 이 건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역사가 담겼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을 현판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02.jpg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공민왕)

 

03.jpg
대안문 현판
 



건물의 얼굴, 현판
우리의 옛 건물에는 어김없이 현판이 걸려 있다. 궁궐은 물론 사찰이나 서원, 고택 등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 마주하는 것이 바로 현판이다. 오늘날로 치면 간판과 같은 것이다. 현판(懸板)은 한자 뜻 그대로 ‘글씨나 그림을 새겨 벽이나 문 위에 다는 널조각’을 말한다. 건물의 얼굴에 해당하는 만큼 건물의 정중앙 처마 아래에 달았으며, 당대 최고의 명필 혹은 학자들의 글씨가 많았다. 보통 명필의 글을 받아서 그 글씨를 본 삼아 널빤지에 글씨를 새겼다. 건물의 규모나 성격에 맞게 색채와 장식을 더하기도 했다. 글씨는 금니(금물), 은니(은물), 먹, 호분 등을 사용했으며 바탕색은 글씨의 색을 고려 해 칠을 하거나 그냥 두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에 현판이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로 사찰에 현판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가장 오래 된 것은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의 글씨로 된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이라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경북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군청에 걸려 있던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도 가장 오래된 현판에 속한다. 두 현판 모두 예술적 기질이 남달랐던 고려 공민왕의 글씨다. 경북 북부지역 곳곳에 공민왕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전해오는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1361년 겨울 영주(순흥)에 도착했다가 그해 12월 다시 안동으로 옮겨 이듬해 2월까
지 머물면서, 지역 관리와 백성들의 환대에 감동해 많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옛 건물에 들어서기 전 일단 고개를 들어 보자. 현판이 보인다. 스스로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핵심만 뽑아서 말이다.

대한문(大漢門),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현재의 대한문이 아니다.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경희궁 흥화문 등 모든 궁궐의 정문은 남쪽에 있고, 또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의 ‘화(化)’자가 이름 가운데 들어 있다. 덕수궁도 경운궁 당시 정문은 지금의중화문 자리쯤에 있던 인화문이었다. 실제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뒤, 늘 위협을 느꼈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할 때 이 문으로 들어왔다.


04.jpg
대안문을 나서는 국장 행렬
 


05.jpg
대한문 현판
 



대안문이 정문이 된 것은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난 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여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으면서다. 또 당시 대안문 앞으로 큰 길이 나면서 인화문으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졌고, 인화문 쪽으로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나면서 정문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만 남은 것이다.

대안문은 가로 347㎝, 세로 124㎝ 크기의 대형 현판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민병석이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로 썼다.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꾼 뒤 억측과 오해가 난무했다. 우선 ‘安’자에 ‘계집 녀(女)’자가 들어 있어서 좋지 않다는 당시 통념 때문에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엇보다 대한문의 ‘한(漢)’자가 대한제국의 약칭인 ‘나라 한(韓)’자가 아니라 ‘한나라 한(漢)’자인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중국을 숭상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거나,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시하는 뜻에서 ‘놈 한(漢)’자를 쓴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가장 신뢰할 만한 설명은 ‘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樑文)’에 나와 있다. 상량문에 보면 “이에 대한(大漢)이란 정문을 세우니 고문(皐門, 왕궁의 바깥문)과 응문(應門, 왕궁의 정문)의 규모를 다 갖추었도다. 단청을 정성스레 칠하고 소한(霄漢)·운한(雲漢)의 뜻을 취하였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하도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말한 운한은 은하수를 말하는데, <시경대아탕지십> ‘운한’ 첫 구절에 “환한 저 은하수가 하늘에 밝게 둘려 있네”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소(霄)와 한(漢)은 바로 하늘과 관련된 뜻으로 대한문은 곧 ‘큰 하늘’, 즉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한말 당시 국난을 극복하고, 자주국가로써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06.jpg
1. 덕수궁 중화전의 황색 창호 2. 중화전 계단의 답도에 새겨진 용 문양 3. 중화전 드므에 새겨진 만(萬)자와 세(歲)자
 



이러한 고종의 의지는 덕수궁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우선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다. 다른 궁궐의 법전처럼 근정전, 인정전 등 ‘政’자를 쓰지 않고 ‘中和’라고 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으로 <중용>에서 유래했다. ‘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和’는 천하의 공통된 도를 말한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가 형식적인 절차로 끝나는 게 아닌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 당당히 자리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또 창호를 보면 다른 전각과 달리 황색으로 칠해져있고, 중화문 계단의 답도(임금이 지나는 길)와 월대 계단의 답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국에 사대하는 제후국의 위치를 상징했던 봉황 대신 용을 새긴 것은 덕수궁이 유일하다.

특히 중화전 월대 앞쪽 동서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드므’는 황제국으로서의 위세를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뜻의 순 우리 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그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여기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쪽에 놓인 드므에는 국(國)·태(泰)·평(平)·만(萬)·년(年) 다섯 자가, 서쪽 드므에는 희(囍)·성(聖)·수(壽)·만(萬)·세(歲) 다섯 자가 새겨져 있다.

각각 ‘나라가 태평하게 만년토록 이어지시라’, ‘성명한 임금의 수명이 만세에 이르니 기뻐하다’라는 뜻이다. 이전까지 ‘만세’라는 말은 마음대로 쓸 수 없는 표현이었다. 중국의 황제가 ‘만세’이고 조선의 왕은 ‘천세’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되면서 드므에 만세를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숭례문은 왜 세로로 쓰였을까
‘궁궐이나 성문의 현판은 가로쓰기가 보통이다. 그런데 숭례문(崇禮門)은 세로로 쓰여 있다. 왜일까. 바로 불 때문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숭례문은 불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숭례문의 불과의 씨름은 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성을 옮기기로 한 뒤, 백악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경복궁을 남향으로 앉히려다 보니 한양의 조산(祖山)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런데 관악산은 예로부터 화산 또는 화형산으로 불렸다. 산봉우리가 뾰족뾰족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나오는 화기가 궁을 침범한다고 보고 그 방책을 강구했다. 풍수에서 불은 물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보지만, 관악산은 달랐다. 화기가 너무 강해 한강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경복궁 정남쪽에 큰 문을 세워 화기를 정면으로 막게 했다. 이 문이 바로 숭례문이다. 또 숭례문의 숭(崇)자는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고, 례(禮)자는 오행에서 화를 상징한다. 즉 ‘숭례’는 불이 타오르는 의미의 문자가 된다. 현판을 세로로 단 것 또한 화기를 누르기 위한 차원이다. 곧 불로 불을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07.jpg
숭례문 현판
 



숭례문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었다. 도성 축조 책임자였던 그는 궁궐이나 전각, 거리의 이름을 손수 지었는데, 유교의 핵심 덕목인 ‘인의예지신’을 담았다. 이에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문은 홍지문이라 명했다. 동대문의 경우 흥인문이라 하지 않고 흥인지문이라 한 것은 문 앞의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도성 중앙의 누각을 ‘보신각’이라 했다. 숭례문의 글씨는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 알려졌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친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은 그 이름 덕분인지 일제강점기에 양쪽 성벽만 헐렸을 뿐, 2000년대 들어서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해온 유일한 성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겨울, 일순간에 무너저버렸다. 방화로 인한 화재에 문루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얼굴이었고, 오늘날에는 국보 1호라는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불에 타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숭례문을 본 시민들의 안타까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후 복원할 때는 서울 지덕사(양녕대군 사당)에 소장된 150년 전의 숭례문 현판 탁본 자료 등을 토대로, 한국전쟁 이후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됐던 ‘숭’자와 ‘례’자를 바로잡았다.


광화문, 본래 색 찾는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가 조선을 세우면서 새로 지은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 없이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세종 7년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름 그대로 ‘빛이 사방에 퍼지고 왕의 큰 덕이 온 나라에 미친다’는 뜻이다. 이는 ‘광화문상량문’에 담긴 “해와 달의 빛을 사심 없이 비춰주고, 비와 이슬의 은혜가 고루 적시듯이…”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 불에 탔다가 1864년 고종 때 다시 지어졌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갖은 수난을 겪었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일본은 조선총독부 건물의 남쪽 시야를 트이게 하고자 광화문을 경복궁 북동편(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겼다. 여기에는 조선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훼손하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다. 결국 나라 잃은 왕궁의 정문은 남문으로서의 위엄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폭격을 맞아 석축만 남긴 채 모두 불타버렸다. 1968년 다시 원위치로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됐으나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것은 물론, 본래의 중심축에서 어긋나 틀어졌고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버렸다. 현판도 원래의 한자가 아닌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한글로 쓰여졌다. 이후 지난 2006년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돼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완공된 광화문은 다시 한자 현판을 달았다. 당시 한자냐, 한글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문화재 복원 취지에 따라 한자 현판을 달기로 했다.

광화문은 현재 본래의 색상을 찾고 있는 중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 글자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리건판(1916년경 촬영)과 일본 동경대학교가 소장한 유리건판(1902년경 촬영) 속의 현판 색상을 고증의 근거자료로 삼아 만들어졌다. 그러다 지난해, 1893년 이전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 사진이 발견되면서 본래의 색을 찾는 연구가 시작됐다. 이 사진을 보면 현판의 바탕색이 글자색보다 진해 검은색 바탕에 흰색이나 금색 글씨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나왔다.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등의 정문 현판도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다. 이로써 올해 말 자신의 원래 색을 찾은 광화문을 마주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두 줄로 쓰인 ‘흥인지문’
서울 성곽에 있는 8개의 대·소문 가운데 동쪽에 있어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정사각형 안에 4글자가 들어 있는 특이한 모양이다. ‘흥’은 번창한다는 뜻이고, ‘인’은 오행 중 목(木)에 해당하며 방위는 동쪽을 나타낸다. 즉 동쪽을 흥하게 하여 허함을 막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흥인지문이 위치한 땅이 낮고 지세가 약해, 현판의 글자 수와 행을 늘려 땅을 높이고 지세를 보완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실제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다.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고, 이 약한 기를 보충하기 위한 풍수적 목적에서 옹성을 쌓았다.

이제 궁궐이나 사찰, 고택 등을 찾을 때 정문에서 고개를 들어 보자. 그리고 현판에 적힌 이름을 불러보자. 그 이름에 담긴 역사와 숨은 이야기 또한 고개를 들 것이다.



08.jpg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 광화문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