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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에 서서 세상을 보니

그 섭리(攝理)가 오묘하다


글. 이상면 편집인
사진.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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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가련봉과 두륜봉 사이 ‘만리재’에서 바라본 풍경
 



땅끝마을 해남을 가다
지난 7월의 어느 날 싱그러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다섯 시간 남짓 달려가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남단 ‘땅 끝’ 마을이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우리나라 대표적 관찰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땅 끝을 ‘토말(土末)’이라 명명했으며, 우리나라 최남단의 공식적 좌표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해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노령산맥이 되고, 그 노령산맥이 무안반도로 뻗어 내리더니 그중 하나가 갈라져 무등산, 월출산을 지나 두륜산으로 이어지면서 해남반도를 형성하는데 이 반도의 끝이 바로 ‘땅 끝’이다. 이 땅 끝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 땅 끝(토말)이며, 북위 34도 17분 21초, 동경 126도 31분 22초에 걸쳐 있다. 따라서 남쪽 기점은 이 곳 땅 끝 해남현,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을 통해 해남 땅 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도 온성까지를 2천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땅 끝에 새겨진 역사
‘땅끝탑’이 있는 갈두산 사자봉 정상 전망대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먼저 듬직하게 생긴 섬 하나가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보길도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가 당파에 찌든 정치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며 못다 이룬 실학의 실천 세상을 꿈꿔 왔던 흔적이 세연정과 함께 여기 저기 남아 있는 곳이다. 또 갈치젓과 미역의 산지로 유명한 추자도가 보이며, 맑은 날이면 멀리 제주도 한라산까지 아련히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객선과 고깃배가 갈매기들의 합창에 한껏 흥을 돋우며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둥실 둥실 두둥실 춤을 추는 이곳,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며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그래서일까. 땅끝탑에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항하는 배를 형상화해 놓았다. 또 땅 끝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곳임을 강조하며 ‘시작점’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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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봉
 



이때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 그의 일성이 귓전을 맴돈다. 바로 해상 왕 장보고다. 그는 “바다를 정복하는 자가 진정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그의 정신이요 좌우명이자 철학이었고, 그를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실제 신라・중국・일본은 물론 중동까지 해상을 주름 잡으며 해양 실크로드를 건설했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해상 왕’이었다.

또 떠오르는 의문은 이 땅 끝이 이 한반도만의 땅 끝일까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소백산맥의 지류를 따라 뻗어 내려오다가 최남단 해남반도를 이루며 우뚝 솟은 두륜산에 대해 알아보자. 두륜산(頭輪山)은 백두산의 ‘두(頭)’자와 중국 곤륜산의 ‘륜(輪)’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곤륜산은 사실 중국 땅이라고는 하지만 중국 북서쪽 끝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과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티베트 고원 사이에 있는 ‘쿤룬 산맥’이다. 해상 왕 장보고 유적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로 볼 때 ‘땅 끝’은 한반도 백두대간의 남단 끝을 넘어 지구촌 온 대륙의 끝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두륜산은 주봉인 두륜봉을 중심으로 가련봉・고계봉・노승봉・도솔봉・혈망봉・연화봉 등 여덟 개의 봉우리가 웅장하게 솟구쳐 있고, 그 아래로는 남해의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천하 절경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뿐만 아니라 그 봉우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누워 있는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함을 더한다.

불교에는 미래의 부처를 바라는 ‘미륵(彌勒)신앙’이 있으니, 언젠가 누워 있는 저 부처가 일어나는 날 세상은 새로워지려는가. 아니 어쩌면 기다리고 있는 미륵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나 우리가 무지몽매해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튼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운 두륜산 품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인 대흥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그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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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서 바라본 추자도와 보길도
 




두륜산에 얽힌 이야기
먼저 대흥사에는 임진왜란의 영웅 서산대사의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있으며, 서산대사뿐 아니라 수많은 고승들의 부도와 탑들이 산재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 ‘다도와 참선은 하나’라는 의미의 ‘다선일여(茶禪一如)’를 강조해온 한국 다도의 성인 초의선사가 40년 동안 수행했던 ‘일지암’이 두륜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선사는 그곳에서 다산 정약용으로부터는 유학과 시문을 배웠고, 해동 제일의 명필 추사 김정희와는 친교를 나눴다. 폭넓은 지식인으로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초의선사는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년 수’와 ‘북 미륵암’ 등 많은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특히 괄목할만한 것은 대둔산 두륜봉에 걸쳐 있는 ‘코끼리바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코끼리바위가 오늘날 대둔산과 대흥사를 빛나게 한 일등공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바위의 모양새와 그 바위에 담긴 설화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이야기인즉, 그 옛날 두륜산 기슭에 ‘장춘’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언제나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에 바다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들어와 마을을 짓밟고 해악을 끼치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러자 흠이 없는 한 아이가 보현보살이 보낸 코끼리 등에 올라타 그 용의 무리와 싸워 이기고 마을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권선징악의 의미가 짙게 배인 설화다. 한마디로 땅 끝에서 평화의 씨가 뿌려질 징조로 해석되니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으며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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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흥사 2. 코끼리바위 3. 만일암 오층석탑
 



대흥사는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과 얽힌 일화도 있어 흥미를 더해 주는 곳이다. 문 대통령은 6・25동란에 감행됐던 흥남철수작전 때 남쪽으로 내려온 아버지를 59세의 젊은 나이로 떠나보낸 후, 사법시험 도전을 위해 출가(出家)해 1978년 선배의 소개로 이곳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고 한다. 대흥사의 사정으로 오래 머물러 있지는 못했지만, 그 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고시공부를 계속한 끝에 1979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게 되므로 문 대통령에게 이곳 대흥사는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해남에는 명산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달마산이다. 이 달마산이 품은 사찰이 미황사다. 해남 두륜산의 대흥사가 북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찰이라면, 달마산의 미황사는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찰로 알려졌다. 과거 서역으로부터 무역의 통로로 삼았던 길을 ‘실크로드’라 일컫는데, 여기에 이 두 사찰이 주는 의미가 있다. 즉 서역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으로만이 아닌 해상 왕 장보고길이라고 하는 해양 실크로드로도 무역이 왕성했었음을 알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이곳 해남 땅 끝은 육지와 해상 상호간에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요 희망이며, 나아가 육지의 끝과 해양의 끝이 서로 만나는 교역의 중심지요, 동서 문화의 요충지가 분명해 보인다.

동방(東方)이란 무엇인가
‘희망의 땅’ 해남 땅 끝이 주는 의미는 이뿐일까. 예부터 우리나라는 ‘동방(東方)’ 내지는 ‘동방의 나라’라고 일컬어 왔다. 그래서인지 인도(지금은 방글라데시)의 성인 ‘타고르’는 우리나라를 찬미하는 시를 지었으니 그 유명한 <동방의 등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찬란한 빛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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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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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은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땅끝탑과 함께 설치돼 있다.
 



그렇다. 이 시를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 ‘땅 끝’이 주는 상징성이 바로 이 나라 한반도 땅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륜산의 의미에서도 살펴봤듯이 지구촌의 땅 끝 나라 대한민국, 즉 한반도를 두고 이른 말이라는 사실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땅 끝의 표면적 의미에 해당될 뿐 본질적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왜 그럴까. ‘땅 끝’ 곧 ‘동방’이라 함은 ‘해가 뜨는곳’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지구상에 해가 뜨지 않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동방, 곧 해가 뜨는 나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왜 해가 뜨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 돼야 한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그 답을 찾아 보자.

1392년 이성계는 망해가는 고려를 무너뜨린 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했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라는 국호가 갖는 의미가 바로 ‘동방’ ‘광명’이며, 나아가 ‘아침의 나라’라고도 한다. 직역하면 ‘해가 일찍 뜨는 아침의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말일 게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조선은 국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순종까지 27대에 걸쳐 519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이라는 국호는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고쳐 부를 때까지 505년 동안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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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고조선(古朝鮮)에 관한 얘기다.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최초 고대국가인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의 국호도 ‘조선(朝鮮)’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자신이 세운 나라를 조선이라고 하고, 단군이 세운 나라를 옛 고(古)자를 붙여 ‘고조선(古朝鮮)’이라 칭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은 최초 고대로부터 ‘동방’이요 ‘해가 일찍이 뜨는 나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면면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급했듯이 저 하늘의 해가 뜨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바다에서 해가 올라오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연유에서 이러한 이름을 우리 민족만이 유독 가졌고 또 이어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난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 경서인 성경으로부터며, 그중 창세기 2장 8절에 ‘동방의 에덴’이라고 기록돼 있는 데서다. ‘에덴’이란 뜻은 ‘기쁨’을 의미하니,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에덴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또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하나님은 곧 말씀’이라 했고, 시편 84편 11절에는 ‘하나님은 해’라고 했으니, ‘해 뜨는 곳’인 ‘동방’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인지 성경의 창세기뿐만 아니라 선지서 중 하나인 이사야서 41장 2절에는 ‘동방’, 9절에는 ‘땅 끝’ ‘모퉁이’, 25절에는 ‘해 돋는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요한계시록 7장 2절에도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印,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도장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한다는 내용이다.

또 구약 성경 이사야서 11장 11절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의 태동과 함께 면면이 이어져온 조선이라는 나라는 언젠가 그 후손, 즉 조선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예에 의해 해가 뜨는 나라 ‘동방(東方)’이 세워지는 게 아니라, 잃었던 ‘동방의 에덴’을 회복하는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날 것을 선지서는 긴긴 세월 알려온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진실을 한 번 더 콕 집어준 인물이 타고르였다.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노래불러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라는 말처럼, 내가 참으로 알 때 보일 것이다. 예부터 부지불식간에 말하고 봐왔던 피조물들은 언젠가 그 지으신 이의 계획에 따라 그 본성과 참 의미가 다 드러나고 나타날 것이다. 그때 지음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지으신 조물주의 위대한 능력을 증명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땅 끝에 서서 세상을 보니 그 섭리가 참으로 오묘함을 느낀다. 만물을 통해 깨닫게 하는 지혜는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에게만 허락된 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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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바위에서 바라본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