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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열린 하늘

‘회복’을 말하다


원구단과 국새 환수로 본
환지본처


글. 백은영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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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는 불교용어로 ‘(모든 것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온다)’는 의미다. 환지본처라는 말을 처음 들은 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불현듯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회복(回復)’이다. 바야흐로 작금의 시대는 모든 잘못되고 왜곡된 것들이 바로 잡히고,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이 명백히 드러나고 구분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가. 회복이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자꾸만 메아리치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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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단 지도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에 천손(天孫)이라 불리던 민족이 있었다. 이들은 해마다 10월 상순이면 둥그렇게 쌓은 제천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를 올렸다. 바로 한민족이라 불리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아주 오랜 옛적부터 원구단이라는 제천단을 쌓아 ‘태평성대(太平聖代)’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제천의식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으로 그 명맥을 이어 갔다. 후에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던 이 제천의식은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433년 만에 하늘에 제를 올리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재위 1863~1907)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2세에 즉위했다. 어린나이에 즉위한 탓에 정권은 결국 아버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른바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결혼 후에는 비(妃)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 다툼 속에서 갈등을 겪었으며, 집권 기간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간섭을 겪어야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과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이어 1885년 청·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한반도에 다시금 발을 붙이게 됐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고종은 특단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의 출범을 알리는 고제(告祭)를 지냈다. 원구단에서 마지막으로 하늘에 제를 올린 지 433년 만의 일이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 다음날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연호도 ‘광무’로 바꾼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 이는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자주 독립국가임을 당당히 내외에 선포한 쾌거였으며, 동시에 우리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손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종은 이 일을 위해 명당으로 꼽히는 자리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칙에 따라 둥근 원단을 쌓고 12층계를 만들고 12위를 모셨다. 그 뒤 1902년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돌북(石鼓) 3개로 된 석고단도 만들었다. 원구단은 공적인 국가의 제단이며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나타내는 가장 신성한 성지였던 것이다. 원구단에서 지내던‘천제(天祭)’에는 또한 ‘인간이 하늘과 땅에 보답하고 바라는 바를 지구상에 이루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범민족통일화합운동본부 박영록 총재는 과거 원구단에 대해 “하늘의 뜻을 받아서 ‘천리(天理)’가 통하는 하늘과 같은 세상을 현 세상에 만드는 것이 바로 원구단에서 천제를 지내면서 바랐던 뜻”이라며 “하루속히 원구단 제천권을 회복해 하늘의 자손으로서 장자민족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 국새는 어디에
고종의 황제 즉위 선포와 대한제국 출범에도 불구하고 1910년, 일제강점에 의한 국권침탈이라는 암울한 역사가 시작됐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과 같은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역시 우리는 포기를 모르는 민족이었다. 조국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과 의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주권을 빼앗긴 지 36년 만인 1945년 ‘광복’을 맞게 된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라를 상징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새가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새는 1948년 정부수립 당시 제작돼 1962년까지 사용됐다. 헌데 이 국새가 어느 날 돌연 그 자취를 감췄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와 의정부고총동문회 등의 시민단체가 지난 6월 ‘대한민국 국새찾기 운동본부’ 발대식을 갖고 본격적인 국새 찾기에 나섰다. 국새찾기 운동본부에 따르면 2005년 감사원 감사 결과 분실 사실이 밝혀졌으나 아직까지 환수를 위한 정부 차원의 적극적 대응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국새찾기 운동본부 이광수 공동대표(의정부고등학교 총동문회장)는 “대한민국 국가 상징이 분실됐음에도 정부 차원의 공식 대응이 없었던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발대식 이후 국회 청원 등을 통해 분실 사실을 공식화하고 정부 차원의 적극적 노력을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최근 대한민국 초대 국새가 1962년까지 사용됐다는 자료를 발굴했다. 1962년 이후 분실된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관련자와 기록을 면밀히 조사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해 앞으로 이들의 활동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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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국새 황제지보(인면) 2.대한민국 초대 국새 3.국새와 어보
 



1. 대한민국 5대 상징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국새, 나라문장(國章)

2. 국새
국왕의 명에 따라 외교문서나 각종 국내 행정문서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됨

3. 어보
조선왕실에서 책봉(冊封), 상존호(上尊號), 상시호(上諡號), 추존(追尊) 등의 의례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권위를 나타냄





대한민국 국새는 국가 주요 문서와 외교문서, 훈포장(훈장과 포장) 등에 사용되는 공식 도장으로 애국가, 무궁화와 더불어 ‘대한민국 5대 상징’1에 포함된다.

국권의 상징, 대한제국 국새
대한민국 초대 국새를 찾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됐음에도 좋은 결과를 예측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몇 년 전 불법 반출됐던 대한제국 국새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25일 당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대한제국 국새2 황제지보(皇帝之寶)를 비롯한 9점의 조선왕실인장을 전달했다. 한 나라의 수장이 직접 약탈문화재를 들고 와 반환한 것은 유례없는 일로, 세계 문화재 반환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시민단체가 펼친 작전명 ‘응답하라 오바마-왕의 귀환’ 프로젝트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국새가 어떻게 미국까지 흘러들어가게 된 것인가.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뒤, 황제국의 권위에 맞게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를 용으로 변경하는 등 황제지보를 비롯한 국새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1907년에는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순종에게 전달됐으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면서 조선총독 데라우치에 의해 일본 궁내청으로 보내지게 됐다. 왕의 상징이자 국권의 상징을 빼앗긴 것이다. 이후 1946년 8월 15일 맥아더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미군정청 하지 중장을 통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바라 마지않는다’는 친서와 함께 황제지보를 비롯한 대한제국 국새를 돌려줬으나, 6·25전쟁 중 미군이 종묘와 궁궐에서 국새를 훔쳐가 다시 그 행방을 감췄던 것이다.

대한제국 국새 반환, 그 중심에는 역시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의 시민단체와 미주 동포들(한인사회), 의식 있는 몇몇 국내 정치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대한제국 국새의 반환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당시 국새 환수와 관련해 혜문 대표는 “2010년 미국 메릴랜드에 위치한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미국 국무부 관리가 작성한 전쟁 중 서울에서 발생한 ‘미군의 문화재 절도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아델리아 홀 레코드’로 불리는 이 문서를 통해 전쟁기간 중 미군이 ‘임금의 도장’을 훔쳤고, 한국 정부가 47개의 옥새를 워싱턴의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분실신고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후 미국 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새의 흔적들을 조사하던 중 LA카운티 박물관에 조선 8대 임금 중종의 왕비 어보3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수년에 걸쳐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노력했다. 2013년 9월 박물관 측은 6·25전쟁 당시 분실된 도난품을 인정, 한국으로 반환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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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대자
 




대한제국 국새는 LA카운티 박물관이 조선왕실의 옥새를 반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미국 골동품상이 또 다른 옥새의 행방을 신고하면서 우연찮게 발견됐다. 용의자의 집을 수색한 결과 9점의 옥새가 추가 발견됐는데, 바로 그중에 행방이 묘연했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 ‘황제지보’가 있었던 것이다. ‘황제지보’는 2017년 1월 2일 보물 제1618-2호로 지정됐다.

문정왕후어보, 현종어보도 귀환
2014년 국새 반환 당시 미 국토안보수사국에서 압수, 보관 중에 있어 반환목록에서 제외됐던 ‘문정왕후어보’가 드디어 돌아온다. 67년 만이다. 문화재청이 미국 이민관세청과 한・미 수사공조를 통해 환수를 추진해오던 ‘문정왕후어보’와 ‘현종어보’가 조국의 땅을 밟는다. 오는 8월경이면 일반에도 공개될 가능성이 크다.

‘문정왕후어보’는 명종 2년(1547) 중종비인 문정왕후에게 ‘성렬대왕대비’(聖烈大王大妃)의 존호(尊號, 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리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현종어보’는 효종 2년(1651)에 현종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이번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두 어보의 환수는 ‘호조태환권 원판(2013. 9. 3. 환수)’과 ‘대한제국 국새 등 인장 9점(2014. 4. 25. 환수)’에 이어 한국과 미국이 양국 간 수사공조를 통해 환수되는 3번째 사례다.

문화재청은 이번 어보 환수와 관련해 “외교부와 대검찰청도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미 국무부, 법무부 등과 신속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며 적극 지원했다. 또한 안민석 의원(더불어민주당)과 민간단체등에서도 LA카운티박물관을 직접 방문하는 등 각계가 공동으로 노력해 이루어낸 성과”라는 입장을 전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수많았던 수난의 역사 속에서 해외로 유출된 한국 문화재가 무려 16만 7968점이 이른다고 한다. 개인소장품까지 추정하
면 최소 45만 점이 된다고 하니 참으로 많은 문화재가 기약 없는 타국살이를 하고 있다. 45만 점에 달하는 약탈・유출 문화재 중 반환된 문화재는 약 9천 점에 불과하다. 문화재 환수의 어려움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허나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6・25전쟁 후 폐허가 된 가운데서도 ‘쓰레기통에 장미꽃을 피운 나라’가 아니던가. 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그 어렵다는 문화재 반환을 하나, 둘 이뤄내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특히 지난 2014년엔 미 대통령이 직접 약탈 문화재를 반환한 선례를 만들 만큼 뚝심 있는 민족이다. 이 뚝심의 근원엔 ‘천손’으로서의 자부심과 의무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또한 왕권과 국권을 상징하는 국새가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환지본처’의 때가 됐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례가 아닐까.

곳곳에 묻어 있는 천손의 상징?
옛날 우리 선조들이 상투 틀고 갓을 쓰고 다니던 모습에서도 천손민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민족종교에서는 천손인 우리 민족이 하늘을 모시고 살았기에 하늘의 이치를 의복에 담았다고 설명한다. 민족종교의 하나인 갱정유도에 따르면 ‘상투’는 한자로 머리 위를 가리키는 ‘상두(上斗)’가 변해 ‘상투’가 됐다고 본다. 여기에서 ‘두(斗)’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두(斗)와 같은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소우주라고도 하는 사람에게 머리는 마치 북두칠성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주가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여기에서 또 북두칠성 자체만을 두고 보면 7개의 별이 북두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바로 이 이치를 담은 게상투라는 것이다. 갱정유도에 따르면 상투를 올릴 때도 방법이 정해져 있다. 머리카락을 정수리로 모두 올려 끈으로 묶는데, 이 끈은 앞에서 볼 때 4번 뒤에서 볼 때 3번 돌아가도록 묶는다. 이는 북두칠성의 7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상투를 틀어서 봉긋하게 올라온 머리는 북두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상투를 튼머리가 북두칠성의 기운, 하늘의 기운을 받는 천문의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이 하늘의 기운을 받는 머리(상투)를 보호하기 위해 썼던 것이 바로 ‘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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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머리는 북두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상투를 튼머리가 북두칠성의 기운, 하늘의 기운을 받는 천문의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이 하늘의 기운을 받는 머리(상투)를 보호하기 위해 썼던 것이 바로 ‘갓’이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만물을 지은 창조주의 섭리가 또한 만물안에 담겨 있다는 것처럼 그 이면의 숨은 뜻을 알고 나면 무릎을 ‘탁’하고 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섭리요, 이치다.

여기서 하나만 더 짚어보자. 예로부터 우리 민족(한민족)을 부르던 이름이 있으니 바로 동이족(東夷族)이다. 우리 민족이 종교와 함께 시작돼 종교문화를 꽃피웠던 유일무이한 천손민족이었다는 것이 이 말안에 감춰져 있다. 동이족의 ‘이(夷)’는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말씀을 뜻하며, ‘동(東)’은 단순히 방향적 의미를 넘어 해가 뜨는 곳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경서인 성경에서 ‘해’는 바로 하나님의 상징적 표현이다(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시편 84:11). 따라서 동이족이라 함은 말씀(하나님)이 시작되는 곳이니 이는 신의 역사가 이 땅에서 바로 우리 민족과 함께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전 미 대통령 오바마의 고별연설이 화제가 된 바 있다. “‘Yes, We can! Yes, We Did!”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뤄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문장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우리 민족 또한 ‘할 수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수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소망을 이뤄냈
고, 하늘이 함께하기에 무력과 불법과 폭력이 두렵지 않았다.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천손’이라는 자부심과 의무감, 무엇보다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었기에 가능 했으리라 본다.

이제 세상도 불의에서 떠나 선의로 돌아오고 있는 반환점에 있다. 어둠이 가장 짙을 때에 아침이 가까웠음을 알 듯, 너무도 혼돈한 세상은 바로 ‘회복’의 전환점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늘이 다시 열려 이치와 천리를 아는 세상. 그 세상을 위해 잘못된 것을 함께 바로잡아가는 민족이 우리 민족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