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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꽃이 피다


글. 김일녀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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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926년 발표된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이다. 어느 산골 고향에 찾아오는 봄인들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마는 유독 떠오르는 한 곳이 있다. 봄이면 어김없이 온 마을이, 온 산이 연분홍으로 물든다. 환한 웃음으로 마중나온 해가 부끄러운 듯 선분홍 미소로 반짝인다. 하늘과 땅 그리고 온 대지가 함께 빚어낸 빛깔이다. 그래서 천상화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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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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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
 



물이 맑고 산이 푸르며 인심이 후한 삼청의 고장, 청도(淸道). 1673년(현종 14) 편찬된 청도군의 읍지 <오산지>에는 산과 시내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 길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산천청여, 대도사통(山川淸麗, 大道四通)’에서 청도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기록돼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마치 풀밭에 엎드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토끼의 모습과 닮았다. 그 모습만큼이나 무던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맑은 도’를 간직한 청도. 도(道)와 이치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데, 그 도가 맑기까지 하단다. 이에 대해서는 청도의 지형이 잘 대변해준다. 경상북도 남단 중앙에 있는 청도는 1000m 안팎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다. 외부로부터 어떤 물줄기도 흘러들 수 없다. 대신 청도 동서쪽에서 각각 물줄기가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간다. 동쪽 풍각면 일대 산지에서 발원한 청도천과 서쪽 운문면에서 발원한 동창천이 군의 중앙 남단부에서 합류하여 밀양으로 흘러들어가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간다.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았기에 ‘맑을 청’이라 이름한 게 아닐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이름답게 청도는 예부터 나라의 통합과 위기극복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온 정신문화의 고장으로 불린다. 우선 청도는 ‘새마을정신’의 발상지다. 근
면·자조·협동 정신은 전란 이후 실의에 빠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근대화를 이루는 초석이 됐다.

1969년 8월 초 기습 폭우로 전국의 농촌이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故 박정희 대통령은 피해가 컸던 경남지역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용열차를 타고 경부선 청도지역을 지나고 있을 때, 차창 너머로 박대통령의 눈에 띈 모습이 있었다. 철로변에 위치한 마을의 주민들이 제방 복구와 마을 안길 보수에 여 념이 없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힘을 보태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신도리였다. 이미 마을 안길과 하천, 산림 등이 잘 정비된 상태였다. 특히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 대통령은 “모든 농촌이 이 마을처럼 가꾸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이후 1970년 4월 22일,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원형이 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제창했다.

신도리는 신기리(新基里)와 도곡리(道谷里)를 통합하면서 머리글자 한 자씩을 따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미 1957년부터 농촌 환경 개선사업을 시작해 마을 안길을 정비하고, 부엌·지붕을 개량하고 축담을 새로 쌓았다. 여기에 집집마다 감, 복숭아, 사과 등 과실나무를 키우도록 했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60년이 흐른 지금, 청도는 봄만 되면 천상의 화원이 된다. 도로 양 옆의 농토마다 경사진 산비탈마다 온통 분홍빛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복숭아꽃이니 무릉도원 가늘 길이 이런 길이 아닐까 싶다. 봄뿐만 아니다. 가을이면 수줍은 기색은 간 데 없고, 대지의 빛깔을 닮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또 다른 천상이 펼쳐진다. 여름 내내 내리쬐던 뜨거운 햇볕과 때때로 몰아치던 폭풍우를 그대로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신도리에는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바로 옆에 철로가 있어 수시로 열차가 지나간다. 50여 년 전 새마을운동 태동의 계기를 만들어준 열차. 내달리는 열차처럼 새마을운동의 정신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선 ‘제2의 새마을운동’을 천명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지속가능한 사회 실현, 민족 통일 준비 등을 방향으로 하고 있다.

푸름은 맑음을 뒤따르게 한다
청도는 새마을 정신과 함께 화랑정신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400여 년 전 그 토대가 되는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청도 운문산에서 전해졌다. 신라 진평왕 22년(600년) 원광법사가 중국 수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와 운문산 운문사 가까이 가슬갑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자 가르쳐준 5가지 계율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 등이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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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극락교
 


운문사(雲門寺)는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대작갑사로 창건됐다. 고려 초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린 후 운문사로 불리게 됐다. 고려 말 일연이 5년간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1950년대 비구니사찰이 되었다.

운문사에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대신 1㎞의 청청한 소나무 숲길이 입구까지 이어진다. 푸를 청(靑)을 온 몸으로 대하니 맑을 청(淸)이 자연히 따라온다.

입구에 들어서자 문외한 눈으로 봐도 그야말로 명당이다. 운문산, 호거산 품에 쏙 들어앉은 운문사. 높은 산봉우리가 절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데, 그 모양이 연꽃 같다 하여 흔히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 규모가 대단하다. 그럼에도 어느 곳 하나 미운 데 없이 단아하고 정갈하다. 경내 곳곳에 피어오른 봄과 어우러져 잔잔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운문사 아늑한 품 덕인지 경내 소나무조차 너른 품을 자랑한다. 수령이 약 500년 된 처진소나무로 높이 약 6m, 둘레 3.5m다. 보통 소나무와 달리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고, 자연적으로 둥글게 자라는 나무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됐다. 저 멀리 뫼 산(山) 자를 그리는 능선도 닮은 듯도 하고, 운문사 지붕을 닮은 것도 같다. 이곳을 지나가던 구름도 한눈팔려 잠시 쉬어간다 하여 운문사인가.

운문사 한쪽을 감싸고 흐르는 계곡 위에 극락교가 있다. 스님들의 수행을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었지만, 오래된 돌다리와 연분홍빛 꽃들 그리고 연둣빛 잎사귀가 자꾸만 마음을 홀렸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 보란 듯이 총총총 건너가는 게 아닌가. 헛웃음이 나왔다. 저 녀석은 극락을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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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면사무소에 있는 이서국 표지석
 



신라도 두려움에 떨었던 이서국의 도읍지
옛날 청도에는 신라를 공격해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강한 부족국가의 도읍지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서국(伊西國)이다. 약 2000년 전 청도군 청도읍과 이서면, 화양읍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삼한 소국 중 하나다. <삼국유사> 권1에는 ‘신라 제3대 왕인 유리왕 14년(37)에 이서 사람이 금성(金城)을 쳤다’고 돼 있다. 또 <삼국사기> 권2에 보면 유례이사금 14년(297)에 이서국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가 대병으로 막았으나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 때 홀연히 이병(異兵)이 나타나 신라병과 연합해 이서국을 물리쳤는데, 이 이병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왕인 미추왕의 왕릉 ‘죽현릉’에 죽엽이 쌓인 것을 보고 사람들은 선왕이 음병으로 신라를 도운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1 미추왕 죽엽군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됐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당시 이서국은 상당한 수준의 세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청도 분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도천 주변 마을에 다수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이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고 돌검·민무늬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유력한 집단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이서국의 문화적 기반이 됐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서국의 멸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록상으로 297년(신라 유례왕 14)때까지 성읍국가로 존속해 오다가 신라에 복속돼 이서군이 되었다. 이후 신라가 낙동강 지역을 정벌할 때 이 지역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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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슬산 도통바위 2. 천왕봉 3. 천왕봉에서 바라본 참꽃군락지
 



1000명의 성인이 약속된 비슬산
이번엔 산중 천상화원을 찾아 나섰다. 주소지는 청도군과 함께 대구 달성군에 걸쳐 있는 비슬산(천왕봉 1084m). 맑은 도를 찾아, 하늘의 뜻을 깨닫고자 속세를 떠난 이들은 이 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인지 선인(仙人)들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비슬(琵瑟)’이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산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때 인도에서 온 스님들이 산을 보고 비파 모양이라는 의미로 ‘비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비슬은 고대 인도의 신 ‘비슈누(Vishnu)’의 범어(산스크리트어) 발음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비슈누는 우주의 보호와 유지를 담당하는 신이며, ‘덮는다’는 뜻이다. 이를 한자로 쓰면 포(包, 苞)가 되어 포산이라고도 한다. 수목이 빼곡한 산이란 뜻이다. 또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으나 비슬산 정상의 일부는 물이 차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비둘기처럼 보여 ‘비둘산’이라고 부르다가 비슬산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4월 중순, 산행 들머리인 유가사(瑜伽寺)에서 수도암을 지나 도성암으로 향했다. 2㎞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막을 오르자니, 차라리 산행길이 낫겠다 싶다.

도성암(道成庵)은 유가사의 부속암자로, 신라 혜공왕 때 도성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보면 ‘포산이성(包山二聖)’ 설화가 나온다. 이름도 예사롭지 않은 도성(道成)과 관기(觀機), 두 선사가 주인공이다. 신라 때 이 산의 북쪽 굴에 살던 도성은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사는 관기(觀機)와 교유했다. 떨어진 거리가 10리나 됐지만 바람을 타고 나무들이 휘어지는 것을 보고 기척을 느껴 서로를 마중 나갔다. 도성은 평소 뒤편 바위 위에서 좌선했는데, 하루는 바위 사이로 몸이 솟구쳐 나와 하늘로 떠나갔다. 이후 관기도 도성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려 세상을 떠났다. 도성이 하늘로 떠나간 바위가 도통바위다. 실제 바위 중간에 한 뼘 정도 되는 틈이 있다. 관기가 수도했던 산마루는 관기봉(990m)이 됐다.

이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채 도를 닦던 선인들은 결국 신이 되어 하늘로 가기를 염원했다. 예부터 ‘천인득도지(千人得道地)’로 부를 만큼 이름난 도량으로 알려진 도성암. 가섭불(迦葉佛) 때 부처님의 부탁을 받고 이 산중에서 1000명의 성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산신 정성천왕이 상주하던 곳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비슬이란 이름에도 임금 왕(王)자가 4개나 된다.

도통바위에서 정상을 바라보니 비파가 세워져 있는 듯하다. 아래쪽으로는 유가사와 도성암이 눈에 띄고 달성 시가지도 펼쳐진다. 초록이 짙어질 채비를 하는 산에 수만 연분홍 점이 찍혔다. 봉긋봉긋 피어오르기 일보직전이다.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색의 조화가 그저 신기할 뿐이다. 도성암에서 천왕봉 정상까지는 2㎞도 되지 않으나 계속되는 오르막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나 자신과의 씨름인지, 이 산과의 씨름인지 여하튼 씨름을 했다. 쉽사리 열리지 않는 하늘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마다, 중간 중간 활짝 핀 참꽃과 기묘한 바위들이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 드디어 길고 긴 오르막을 지나 하늘이 열렸다. 능선을 따라 0.4㎞만 더 가면 천왕봉이라는 표지판에 어디서 솟아난 것인지, 다시 다리에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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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수행의 길 끝에 피어난 진리의 꽃
이번 산행의 목표지점은 참꽃군락지이기에 천왕봉에서 서둘러 군락지로 향했다. 돌 틈 사이로 드문드문 피어 있는 참꽃이 길을 안내했다. 진달래, 즉 참꽃은 먹을 수 있고, 약으로도 쓸 수 있어 ‘참’ 꽃이다. 예부터 칡이나 아카시아, 쑥과 같이 춘궁기나 흉년에 밥 대신 배를 채울 수 있는 구황식물이었다. 삼월 삼짇날 무렵 화전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을 담그기도 한다. 간도지역의 중국 동포들은 천지꽃, 천지화라고도 부른다. 반면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는 철쭉은 야박하다 싶겠지만 개꽃으로 불린다. 참과 참이 아님을 분명하게 구분지어야 하겠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시야에 거치는 것 없는 너른 평지는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만이 1000m가 넘는 고지임을 실감케 했다. 마치 보슬보슬 선분홍 융단을 깔아놓은 듯 30
만여 평 산자락이 온통 수줍은 새색시들의 미소로 가득했다. 그 꾸밈없는 빛깔은 자신을 자랑하지도 드러내지 않기에 누구에게든 쉽게 옆자리를 내준다.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이질감이 없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 사실’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 먹을 수 있어 사람을 살게 하는 참꽃처럼 진리는 사람을 살리지만, 먹을 수 없는 철쭉처럼 비진리는 사람을 해친다. 그러나 겉모습만 보면 철쭉이 색깔도 더 다양하고 화려해 사람들 눈에 잘 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참과 참이 아님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 때문에 먹기 전에, 들어먹기 전에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서너 갈래로 갈라진 나무 데크 덕분에 사람들은 좀더 가까이서 참꽃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의 시샘인지 몰아치는 비바람부터 일단 피해야 했다. 해서 찾은 곳이 대견사지다. 시야가 탁 트이고 깎아지른 발 아래로 펼쳐지는 산야가 장엄하다. 모든 것이 트이니 ‘大見’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 서 있으면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치는 건 시간문제일 듯싶다.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이 흥한다’는 사상에 따라 창건됐을 것으로 전해진다.

대견사라 이름하게 된 설을 보면 중국 당나라의 황제가 절을 짓기 위해 명당을 찾고 있었다. 하루는 세수하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황제는 신하들을 파견해 찾게 했으나, 결국 중국에서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 찾아낸 곳이 이 터였다. 중국(대국)에서 보였던 절이라 하여 대견사라 이름 했다는 이야기다.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北 봉정, 南 대견’이라 할 만큼 비슬산 99개의 사찰 중 중심사찰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단일 산 중 암자와 절이 가장 많은 산이 비슬산이었다. 그만큼 종교성이 짙다는 의미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것은 군위 인각사지만, 그의 집필 등에 영향을 미친 사상적 토대가 마련된 곳도 오랜 기간 주지로 있던 대견사 등의 비
슬산 일대다.

대견사 주변에는 기묘한 바위들 천지다. 암괴류다. 약 1만~10만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 때 형성됐다. 큰 자갈 또는 바위 크기의 둥글거나 각진 암석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산 사면이나 골짜기에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하는데 폭 80m, 길이 2㎞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부처바위, 형제바위, 거북바위등을 비롯해 수십 개의 칼을 꽂아놓은 듯한 칼바위까지. 자연만이 빚을 수 있는 형상이다. 그중 눈에 띄는 부처바위. 저 아래 속세를 굽어보고 있는데,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단순 계산으로 감이 오지 않는 수만 년 전부터 이 자리에서 지켜봤을 터인데 세상사, 무엇이 그리 여전히도 번뇌스러운 것인지….

해발 950m 절벽 끝에 서 있는 대견사지 3층석탑. 시야에 가릴 것이 없다. 저 멀리 펼쳐진 겹겹의 능선도, 낙동강을 향해 내달리는 수만의 암괴류와 그 사이사이 빛나는 참꽃도 모두 석탑의 기단 아래 있다. 모든 것을 저 아래에 두고도 아무 말이 없다. 위엄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까. 아무튼 인생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해마다 만물이 깨어날 때마다, 하늘 가까운 비슬산 정상 자락에 온 땅 가득 진리의 꽃이 피어나는 것은 청도와 비슬산 일대에서 맑은 도를 찾아 수행하였을 수많은 이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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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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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