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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그 47일의 기억


백성은 있었으나 임금은 없었다



글. 백은영
사진. 김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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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풀을 살짝 베어 문 듯, 파릇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4월의 봄바람은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뻗은 성벽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 언제였던가. 청나라 군사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임금을 품었던 시절이.
“금수(禽獸)의 땅에서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으니 뭐라 형언할 수 없다”며 가슴 벅차
했던 임금은 이곳 남한산성에서 그가 조롱했던 임금보다도 못한 견양금수(犬羊禽獸)와
같은 자신을 보며 과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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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보이는 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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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성곽길

 


   

남한산성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험난했다. 본격적인 산행(?)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산행을 마친 기분이랄까. 지하철 서울역에서 출발해 4호선에서 2호선, 8호선을 갈아타고 산성역에 내린 후 9번 마을버스를 탄 것까지는 괜찮았다. 정류장을 출발한 버스는 곧 날개를 단 듯 도로를 그야말로 질주하다시피 내달렸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버스는 이내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만원버스가 꽤 경사진 산길을, 그것도 대관령 고개를 갖다 놓은 듯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려면 추진력이 있어야 할 터. 중심을 잡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살짝 뺀뒤, 버스 손잡이를 생명줄이라 생각하며 바짝 쥐어 잡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린 순서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재빠르게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았던 이유를. 산에 오르기도 전부터 다리는 후들후들 떨려왔고 속은 매스꺼웠다. 자기를 빼놓는 게 서운했던지 두통까지 금세 합세했다. 그나마 연녹색의 나뭇잎들과 뺨을 간질이는 청량한 바람이 기운을 북돋아준다. 크게 한 숨 내쉰뒤 남한산성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남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됐다. 이후 1971년 3월 17일에는 경기도립공원으로, 2014년 6월 22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돼 명실상부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국내 초대형산성인 남한산성은 예부터 전략적 거점에 위치해 국가의 보장처 역할을 해왔다.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11.76㎞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당시 조선의 국왕인 인조는 이곳에서 47일간 항전했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한 비운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병자호란으로 더 잘 알려진 산성이지만 사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이에 신라 문무왕은 한산주에 8㎞에 이르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다. 문무왕 12년(672)의 일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인 1624년, 인조는 경기도 광주의 해발 500m 지점에 산성을 쌓았다. 네 개의 문과 다섯 개의 옹성, 우물만 해도 80개나 되는 거대한 산성. 서울의 남북을 방어할 남한산성이다. 바로 이 남한산성의 토대가 된 것이 신라 문무왕대에 쌓은 ‘주장성’이다.

남한산성 축조에는 대개 승군(僧軍)이 동원됐다. 인조는 승도청(僧徒廳)을 두고 벽암대사를 팔도도총섭(八道都摠)으로 임명해 이미 있던 망월사, 옥정사 외에 개원·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동단 등 7개 사찰을 추가로 창건, 총 9개의 사찰에 승군을 머물게 하면서 훈련과 수도방위에 만전을 기했다. 오늘날에는 장경사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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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장릉 사적 제203호, 제16대 임금인 인조(재위 1623~1649)와 인조의 첫 왕비 인열왕후가 함께 잠들어 있다.
 


“살피건대 인조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성을 쌓을 때 각성스님을 팔도도총섭을 삼아 성 쌓는 일을 전임케 하여 8도의 승군을 소집하게 하고 또 성내의 각 사찰에 영을 내려 8도에서 일을 하러 온 승군들에게 음식을 공급해주는 일을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각각의 절에는 처음으로 각 도의 의승을 주관하는 입번 및 승총(僧摠)·절제(節制)·중군(中軍)·주장(主將)의 명칭이 생겼다. 대체로 성내에 있는 아홉 개의 절은 갑자년에 시작된 것이니 … 모두 성을 지키는 일을 맡겼으며, 아홉 개의 절에는 각각 군기와 화약을 보관하였다.”
- <중정남한진(重訂南漢志)> 권3 불우(佛宇) 中


능양군, 숙부 광해군을 끌어내리다
1608년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승하하면서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보좌에 오르지만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라는 태생적 한계가 그를 늘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는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에 나섰다. 그해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당하고 1618년에는 인목왕후마저 폐위돼 서궁에 유폐됐다.

인조의 아우 능창군도 “정원군의 새문안 저택과 인빈의 무덤에 왕기가 서려 있다” “능창군의 관상이 특이하다” 등의 풍문으로 인해 결국 희생양이 됐다. 1615년의 일이다. 정원군 또한 아들의 죽음과 광해군의 의심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1619년 눈을 감는다. 자연스레 능양군의 원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러 1623년 3월 13일,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은 조카 능양군(1595~1648)에 의해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다. ‘인조반정’이다.

반정에 성공한 후 권력을 손에 넣은 인조는 자신감이 높아졌다. 그는 광해군 정권의 붕괴를 공식적으로 선포한 이후에도 구정권 인물들에 대한 숙청을 멈추지 않았다.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의 핵심인물들은 처형되거나 쫓겨났다. 반정의 성공과 함께 대외 정책(명과 후금과의 관계)의 방향도 바뀌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적신(賊臣) 이이첨이 임금의 마음을 현혹하고 국권을 제멋대로 하여 모자 사이를 이간시켜 끝내는 윤리의 변고를 자아냈다. 모후를 내쳐 별궁에 유폐하는 등 갖은 수치와 모욕을 가했다. … 하물며 부모와 같은 중국 조정의 은혜를 배신하고 동방의 예의 풍속을 무너뜨려 삼강이 땅에 떨어진 것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사치가 도를 넘고 형정이 문란하여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안팎이 무너짐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망치고 종사를 전복하기에 충분했다. ….”

1623년 3월 14일 인조 명의로 팔도에 반포됐던 조서의 내용으로 광해군 정권을 무력으로 쫓아낸 명분을 거론한 것이다. 며칠 후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오늘날 이 의거가 성공한 것은 경들의 힘 덕분이다. 금수(禽獸)의 땅에서 다시 사람의 세상이 되었으니 뭐라 형언할 수 없다.”

친명배금(親明排金)이 빚은 결과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인조 정권은 전복될 뻔했다. 이때 인조는 반란군을 피해 공주로 파천하는 수모를 겪었다. 창경궁은 난민들의 방화로 타버렸고, 다시 돌아온 인조는 경덕궁으로 들어갔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백성들은 인조 정권에 등을 돌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괄의 난은 진압됐지만 민심까지 수습하는 것은 어려웠다.

또한 반정 직후 내세웠던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던 호기는 온데간데없어졌다. 계속되는 후금의 압박 속에서도 명과의 부자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이런 정책에 후금은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조선이 자신들을 명보다 못한 수준으로 대접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후금의 은근한 협박 속에서도 1632년 무렵까지 조선이 취한 대외정책은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는’ 노선이었다. 하지만 명과 후금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조선은 ‘아버지’ 명나라와 ‘형’ 후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1636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심양성의 천단으로 나아가 제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고 제단을 향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다. 이후 홍타이지는 연호를 천종에서 숭덕으로 고치고 나라 이름 또한 대청으로 삼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6월 17일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인조의 글에는 청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군사도 재물도 없는 우리는 오로지 대의와 하늘만을 믿는다. 과거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로를 보라. 자중지란이 일어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조선을 침략했던 그의 부하들은 다 죽었다. 반면 우리와 우호를 유지한 도쿠가와 씨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사실상 청과 절화(絶和)을 선언한 것이다.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은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구실을 제공했고, 결국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고야 마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륙정세를 읽지 못한 인조의 잘못된 판단으로 굴욕을 당한 조선. 그 피해는또한 고스란히 백성들이 져야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간 피로인(被擄人)들 중 남자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뒤꿈치를 잘리는가 하면, 여자는 청국 남자의 첩이 돼 수모를 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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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뮤지컬 <남한산성> 중 눈보라 속 인조 임금의 행차 장면    2. 뮤지컬 <남한산성> 중 병자호란의 한 장면
3. 드라마 <꽃들의 전쟁> 중 오랑캐 앞에 삼배구고두례하는 인조의 모습   4. 1633년 광해군일기 태백산사고본

 


삼전도 굴욕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궁을 떠나 공주로 피난을 갔던 인조는 정묘호란 때는 강화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세 차례 모두 궁을 비우고 ‘도망다닌’ 무능한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조였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반정으로 권력을 차지한 인조는 ‘이괄의 난’때 그 칼이 무서워 도망간 못난 임금이었던 것이다. 친명배금정책으로 청의 불만을 샀던 인조는 결국 청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급히 숨어들어야만 했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질풍 같이 내달렸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의주를 지나 곽산과 정주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하라고 지시했다. (중략) 가공할 기동력을 지닌 청군이 순식간에 평안도 내륙으로 깊숙이 돌입하자 각지의 조선군이 올리는 장계(狀啓) 또한 서울로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다. 조선군 전령들의 이동이 곳곳에서 청군 복병들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김자점 등의 판단 착오와 무책임, 거기에 작전의 허점을 틈타 청군 기마대는 질주를 거듭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

인조가 도성을 겨우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모습은 처연했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것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 이어 벌써 세 번째였다.

… 인조 일행은 저녁 9시가 훨씬 지나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사실 남한산성은 천험(天險)의 요새였다. 성곽의 가장 높은 누대에서는 도성과 살곶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더욱이 인조가 들어갔던 무렵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기온이 몹시 떨어져 성으로 오르는 길이 온통 얼어붙었다. 청군의 선봉이 제 아무리 ‘강철 같은 기마대’였다고 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는 험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황망한 와중에 갑작스레 들어온 터라 수비할 군병도, 그들을 먹일 군량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 ‘청, 병자호란을 일으키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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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정문인 남문(좌)과 병자호란 당시 청에 굴복한 인조가 빠져나온 서문(우)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됐다. 25일 청군은 남한산성 서문으로 사람을 보내 “황제가 내일 귀국하실 것이니 국왕이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은 다시 오지 말라”며 그동안 받았던 국서를 모두 돌려줬다. 산성은 계속 되는 포격에 공포에 휩싸였고, 산성 안에서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뒤늦게 강화도 함락 소식을 접한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왕실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버린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인조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결국 인조는 출성을 결심했다.

홍타이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의 아들이나 동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선의 변심을 우려한 처사였다. 홍타이지는 다양한 항복조건을 내걸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삼전도에 이미 수항단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과 1월 30일을 항복 의식을 행하는 날로 정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항복하는 인조는 용포를 착용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는 나올 수 없다는 것도 통고했다. 참으로 굴욕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기어코 날이 밝았다.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색 융의 차림으로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섰다. 산성으로 들어온 지 47일만이었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갔다.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배천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됐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다. 배천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으로 일명 ‘삼전도 굴욕’의 순간이었다.

홍타이지가 자리를 뜬 뒤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 앉아 그들의 지시를 기다렸고, 해가 질 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고가 내려졌다. 인조는 인질이 돼 심양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1637년 2월 2일 홍타이지가 철수 길에 오르자 인조는 또 한 번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그를 전송했다. 홍타이지 뒤로 청군들이 조선인 피로인들을 줄을 세워 끌고 가는 모습이 한참동안 계속됐다.

2월 19일 인조는 내외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내리는 교유문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는 내용이다.

버리지 못한 권력욕, 아들을 버리다
1637년 11월 20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칙서를 들고 왔다. 옥새를 내려 인조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이다. 책봉을 통해 권력을 유지시켜줬지만 청은 ‘명과 교통하지 않겠다’는 인조의 맹약을 믿지 못했고, 안으로는 신료들이 ‘사직과 함께 죽지 않고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인조의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백성들의 민심도 험악해졌다.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갔다 도망쳐온 피로인들을 도로 붙잡아 보내라는 청의 요구도 인조를 곤혹스럽게 했다.

삼전도에서의 굴욕과 자신을 무능한 임금으로 여기는 신료들의 출사 기피, 백성들의 원망 등등 이미 임금으로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위기의식을 느낀 그가 선택한 것은 ‘친청파’가 되는 것이었다. 인조가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가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는 것이었다. 입조란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들여 청 황제를 직접 알현토록 하는 것이다. 입조하게 될 경우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 왕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일 청이 인조를 왕위에서 밀어낸다면 그 자리에 소현세자를 앉힐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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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들어간 지 7년이 지난 1643년 무렵, 소현세자 부부는 농사와 교역 등을 통해 상당한 재물을 모았다. 축적한 재물로 청인들을 접대하고, 몸값을 치르고 조선인 포로들을 구해 내기도 했다. ‘오랑캐’로 취급하며 여전히 청을 무시하려는 조선의 조정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오랑캐와 친해졌다. 이런 모습이 인조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소현세자가 곧 귀국길에 오른다고 하니 근심이 쌓였다.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기쁘기보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을 더 우려한 무정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소현세자 일행은 1645년 2월 귀국했지만 인조의 반응은 냉랭했고, 소현세자가 가져 온 청나라 물건은 인조의 마음을 더 불편케 했다.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하례를 올리겠다는 신료들의 건의도 거부했다. 부친의 냉대와 견제 때문인지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눕고,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한으로 병을 치료받은 지 4일 만이었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말라리아)이었으나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는 증언이 있어 독살 됐다는 주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혹자들은 탁월한 외교 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고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광해군을 죄 많고 무능한 임금이라며 반정을 일으켰던 인조였지만 그자신 또한 대륙의 판세를 읽지 못했고, 백성을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병조호란 당시 인조 스스로가 자신을 가리켜 “견양금수”와 같다 하지 않았던가.

선조와 광해군, 인조에 이르는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줬던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인조와 인목대비가 바로 이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해 도와준 은혜)’을 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것을 광해군의 열 가지 죄악 중 하나로 들 정도로 당시 조정은 ‘친명배금’ 분위기가 강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대륙의 판도를 제대로 읽을 리 만무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 일본에게는 조선을 제 마음대로 주무를 좋은 기회였다. 곤경에 처한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려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청과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고야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동북아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갈등하고 신음하는 나라.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이제는 더 이상 외부세력에 의해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나간 기나긴 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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