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道는 사람을,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김일녀
사진. 글마루



01.jpg
속리산
 



3월 초, 나라 안팎이 온통 혼란하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도 이게 웬일인가 하여 정신없이 꽃샘추위를 떨치나 보다. 환절기다. 아침저녁으로 기온 차가 심하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들쑥날쑥 한다. 이런 날씨에 적응하려고 몸은 안간힘을 쓴다. 그 과정에서 생긴 불안정이 커지면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몸살을 앓기도 한다. 이 나라도 때가 바뀌려는지, 심한 몸살을 앓았다. 겨우겨우 일단락됐지만 곳곳에 남아 있는 후유증이 만만찮다. 그러나 앓는 것도 바르게 앓고 지나가면 몸의 면역력을 높이는 기회가 되듯, 새로운 때를 맞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환절기 몸살이라면 현명하게, 바르게 앓아야 한다. 그래야 회복도 빠르고, 후유증도 남지 않는다.

어지럽고 혼란한 때, 선인(仙人)들은 산을 찾았다. 자연의 섭리가 곧 만물의 이치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옳은 것은 변함이 없고, 늘 그 자리에 있다. 단지 사람이 떠났다가 다시 찾았다가 할 뿐이다. 충북에 있는 한 명산도 이렇게 속내를 전하고 있다. “道는 사람을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이 道를 멀리하였고, 산은 世俗을 떠나지 않았는데 世俗이 산을 떠났네”라고.



02.jpg
국사봉에서 계룡산 쪽을 바라본 모습
 


 
03.jpg
국사봉 표지석
 


기도의 향이 쌓여 하늘에 닿은 향적산
계룡산에서 뻗어 나온 산릉이 충남 계룡시와 논산시에 걸쳐 있는 향적산(香積山, 574m). 이곳에서 도를 깨우치기 위해 사람들이 흘린 땀의 향기가 쌓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향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실제 초입부터 산 중턱까지 곳곳에 크고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등산 기점인 무상사는 숭산 큰스님이 ‘이곳은 국가에 크게 쓰일 스승이 날 곳’이라며 세운 사찰이라 한다. 한국 선사 최초로 서양으로 건너가 해외 포교를 한 숭산 큰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곳까지 온 외국인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곳이다. 무상사에서 정상(국사봉)까지는 2.7㎞. 그만큼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등산이라기보다는 동네 뒷산을 운동 삼아 나온 모습이다.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되자 입구에서 세차게 불던 바람이 온데간데없다. 산중으로 침입하지 못하고 어떤 기운으로부터 밀려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어머니의 품같이 사방이 포근하다. 봄을 재촉하는 날씨 덕분이기도 했지만, 상서로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 형세인 계룡산 줄기를 이어받아 그런지도 모르겠다. 길도 네댓 차례의 오르막을 제외하곤 대체로 완만하다. 낙엽 쌓인 길은 팍신하여 걸을 맛이 났다.

1시간 정도 올랐을까. 아직 한낮도 되지 않은 시각, 하산하는 이마다 일행을 재촉한다. 저 위에 상고대가 피었으니 서두르라는 것이다. 마침 장군암을 기점으로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한 발 한 발 선경(仙境)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저 아래 기도처마다 피워놓은 초와 향이 순백의 상고대가 되어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한낮의 햇살에 정상까지 이르지 못한 상고대는 눈물이 되어 가지마다 맺혔다. 600m가 채 되지 않는다 해도 산은 산이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바람이 거셌다. 상고대가 피어 올린 향도 더욱 짙어져 함박눈이 내린 듯 가지마다 수북이 쌓였다.

헬기장에서 두 갈래로 난 길을 따라 2~300m만 더 가면 향적산 주봉인 국사봉(國事峰)이 나온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새 도읍을 정하고자 계룡산 남동쪽 기슭, 지금의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를 답사했을 당시 이곳에 올라 국사를 논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이 도읍이 되면 나라의 왕을 가르칠 스승이 이곳에서 나온다하여 붙여진 이름(國師峰)이라는 설도 있다. 신도안(新都內, 신도내)은 ‘새로운 도읍’이라는 뜻이다. 도참·풍수지리사상으로 볼 때 전쟁도 피해간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태조는 즉위 다음해에 본격적인 신도 공사를 시작했으나 국도로 부적당하다는 이야기가 나와 1년 만에 공사를 멈추었다. 하지만 지금도 인근 군부대에는 당시 공사에 사용했던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이후 신도안 일대는 민중들이 신성시하는 곳이 됐다. 특히 ‘계룡산의 바윗돌이 희어지면 정도령이 나타나 평화로운 낙원 세상을 만든다’는 <정감록>을 믿었던 수많은 신흥 종교인들이 몰려와 유토피아를 꿈꿨다. 한국전쟁 등 국난을 거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1970년대 계룡산국립공원 보호·관리 목적으로 이들을 공원 밖으로 이주시키기 전까지 이 일대에 자리 잡은 종교의 수는 100여 개나 되었다. 국가의 주도로 이주 작업이 진행됐지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멀리 떠나지 못했다. 여전히 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수십 년간 이어진 기다림은 오늘도 기약 없이 이어지고 있다.

향적산은 작지만 알찬 산이다. 산행의 묘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국사봉 정상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계룡산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쓴 닭볏이 옹긋봉긋하다. 그 능선 아래 펼쳐진 구릉지가 신도안면 일대다. 마침 햇살이 조명처럼 쏟아져 신비스런 광경이 연출됐다. 남다른 유래가 깃든 곳이어서인지 하늘의 주목을 받고 있는 듯 느껴졌다. 향적산 남쪽으로도 놓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는데, 구불구불 이어지는 주산(308m) 능선은 계룡산 자태 못잖다.


   


04.jpg
국사봉 천지창운비와 오행 탑
 


국사봉에는 여느 산 정상에서는 볼 수 없는 두 개의 돌 비석이 우뚝 서 있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와 그보다 작은 오행 탑이다. 그리 오래돼 보이진 않지만 누가 세웠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천지창운비를 덮고 있는 사각지붕 위에는 해와 달과 별이 그려진 흔적이 남아 있다 한다. 눈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하다. 누군가 이곳에 하늘의 기운이 함께한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천지창운비의 비문(碑文) 또한 예사롭지 않다. 동쪽 면에는 천계황지(天鷄黃池), 서쪽 면에는 불(佛), 남쪽 면에는 남두육성(南斗六星), 북쪽 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천계황지(天鷄黃池)는 하늘의 닭, 즉 봉황이 깃드는 천하의 길지라는 뜻이니 이곳에서 복을 나눠줄 자가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불(佛)은 부처를, 남두육성(南斗六星)은 여름밤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궁수자리에 속하는 6개의 별이 북두칠성을 닮아 남두육성으로 불리는 별이다. 예부터 장수를 다스리는 별로 여겼다. 도교에서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신격화하여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긴다. 비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늘, 곧 신의 뜻을 깨닫고자 했던 누군가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신의 이치는 만물에 깃들어 있는 법. 이 이치를 깨달은 자라면 신의 뜻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속리산 깊은 속내에 몸과 마음을 씻는다
웅장한 산세와 달리 이 산 또한 어머니의 품 같이 깊고 아늑하다. 수많은 선인들의 수행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그들을 먹여 살렸고, 씻지 못할 죄로 인해 회한에 찬 임금의 몸과 마음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다. 골은 또 얼마나 깊은지, 1000m가 넘는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물은 잠깐 수원지에 모였다가 다시 세 갈래로 갈라져 동쪽으로는 낙동강, 남쪽으로는 금강, 서쪽으로는 한강으로 흘러간다. 속리산(俗離山), 그 넉넉한 인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잠시잠깐이나마 속세를 떠나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대인배다운 면모까지 갖췄다. 온 산에 조릿대가 군락을 이뤘고 곧고 푸른 소나무가 지천이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기암괴석은 속리산의 뼈대를 이루고, 능선마다 절경을 연출한다.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 화북면에 걸쳐 있는 속리산. 원래 천왕봉(1058m)을 비롯해 9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렸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5년(784), 승려 진표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진표를 따라 입산하여 수도했다. 여기서 세속 속(俗), 여읠 리(離),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화북탐방지원센터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전해지는 문장대(1015m)가 오늘의 목표지점이다. 거리는 이곳에서 3.1㎞. 최단시간에 문장대에 오를 수 있는 코스다. 3월 초이지만 속리산의 뒤편에 해당하는 곳이라 응달진 곳에는 눈이 쌓였다. 하지만 속리산 포근한 품에 영상의 날씨까지 더해져 산행 시작부터 마음은 이미 열린 채였다. 잘 정비된 등산로와 군락을 이룬 연둣빛 조릿대, 그 위에 봉긋한 적설은 무거운 등산화에 기운을 실어주었고, 청량한 소나무는 산행 내내 눈을 맑게 해주었다. 속리산을 닮아 거대하면서도 부드럽게 다듬어진 기암괴석은 자주 발길을 붙잡았다.

적설에 느려진 걸음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2시간 반 만에 문장대(文藏臺)에 도착했다. 원래는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세조가 꿈을 꾸고 이곳에 찾아와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넓이는 3000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큰 구멍이 가마솥만 하게 뚫려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3000명까지 앉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넓은 자리에,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움푹움푹 패인 웅덩이마다 물이 얼어 있었다. 이 물이 바로 세 줄기의 강으로 흘러드는 물이다. 가물지도 홍수도 내지 않는다는 생명수의 원천인 셈이다.



05.jpg
1. 속리산 산행길 2. 문장대 물 웅덩이 3. 신선대 가는 길에 바라본 문장대 4. 목욕소
 



속리산의 상징답게 문장대에 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칠형제봉,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에 이어 주봉 천왕봉이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가까이 관음봉이 솟아 있고, 저 멀리 묘봉이 보인다. 겹겹이 펼쳐진 산 그리메는 하늘 아래 아스라이 수묵화를 그린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1000m가 넘는 고지임에도 바람이 거세지 않아 360도 펼쳐진 수묵화를 감상하기에 딱이다.

제법 큰 문장대 표지석 뒤에는 누군가 지은 글을 새겨놓았는데, 속리산의 진짜 속내가 전해진다. 글머리는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헌강왕 12년(886)에 법주사와 부근 암자들을 둘러보고 읊었다는 시를 인용했다. “道는 사람을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이 道를 멀리하였고, 산은 世俗을 떠나지 않았는데 世俗이 산을 떠났네 (중략).”

서쪽으로 성큼 기울어진 해를 보고 서둘러 신선대로 향했다. 저 멀리 불법(佛法)의 경지에 이르러 한 송이 연꽃이 핀 듯 솟아 있는 문장대와 주변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중간중간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이 나타났다. 경사는 제법 가파르지만, 오랫동안 비바람을 맞아서인지 모서리진 부분 없이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만들어진 만큼 높이도 다르고 폭도 다르다.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학이 날고 신선들이 담소를 나누던 봉우리, 신선대에서 잠시 쉬었다가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경업대에서 만큼은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넓은 바위에 올라서자 전망이 탁 트이며 신선대를 비롯해 입석대 등 기묘한 바위들을 올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심신을 단련한 곳이라 하여 경업대라 이름 붙여졌다. 특히 비석처럼 우뚝 서 있는 입석대는 높이가 1m가량 되는데, 임경업 장군이 7년 수도 끝에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모습도 전설도 기기묘묘하다.

이제는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다행히 올라올 때와 달리 눈길은 거의 없었다. 해가 지기 전 법주사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제대로 눈길 주지 못했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섭섭한 길이었다. 크고 작은 바윗돌과 어우러져 시원스레 떨어지는 계곡물은 계절을 의심케 할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 여름철 녹음이 우거지면 그 청량함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일 게다. 속리산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길이다. 찬찬히 둘러보며 가고 싶은 마음을 몰라주는 해가 야속할 뿐이었다.

평지에 다다를 때쯤 세심정 근처 길 한쪽에 동그랗게 움푹 패인 터가 나타났다. 물레방아와 함께 사용됐던 절구 터다. 13~14세기 이곳에는 고승과 도인, 학자들이 거주하는 작은 암자와 토굴이 400여 개나 있었는데, 그들과 또 그들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이 절구 터에서 곡식을 빻아 만든 밥과 떡, 곡주 등을 제공받아 먹었다고 한다.

속리산은 세조와 얽힌 이야기가 많다. 목욕소는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현 복천암)에 사흘간 머물면서 계곡에 몸을 씻어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곳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노년의 세조가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악행을 참회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스승 겪인 신미대사를 찾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심정에서 법주사까지는 최근에 조성한 ‘세조길’이 이어진다. 2.35㎞로 꽤 길지만 나무 데크와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길 주변에는 노송과 나무들이 즐비하고, 옆으로는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깨끗하면서도 잔잔한 계곡이 이어져 산책길로 그만이다.




06.jpg
문장대에서 바라본 절경
 



法으로 수만 소망 품은 법주사
탐방 마지막 날, 하산 길에 어둠 속에서 마주한 법주사가 아쉬워 다시 찾았다. 법주사 초입,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800여 년이나 되는 천연기념물 정이품송이다. 세조가 요양을 목적으로 온양, 청원을 거쳐 속리산으로 가던중 연(임금이 타는 가마)이 걸릴 것 같아 “연 걸린”고 하자 늘어져 있던 가지를 스스로 올렸다는 소나무다. 이를 기이히 여긴 세조는 나무에 정이품 품계를 내렸고 이후 정이품송으로 불리게 됐다. 오래전 두 번이나 폭설에 가지가 꺾여 반쪽만 남은 모습이지만 위로 쭉 뻗은 몸통은 여전히 늠름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반듯한 삼각형을 그리며 남다른 자태를 뽐냈을 사진 속 옛 모습이 그립다.

정이품송을 지나면 큰 대로변으로 상가거리가 이어지고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을 모두 갖춘 마을이 나타난다. 속리산면이다. 속리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들이다. 매표소 근처에서 1㎞정도 더 들어가야 법주사가 나온다. 소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들로 이어진 숲길은 호젓하면서도 풍요롭다. 높은 나뭇가지에는 겨울 산의 보석이라 불리는 겨우살이가 새둥지처럼 앉아 있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들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는 길이다.

법주사는 속리산 품 안에 들어앉아 있다. 1500여 년 전 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 스님이 서역으로 구법 여행을 하고 돌아와 창건한 절이다. 속세를 벗어나 법(法)에 안주할 수 있는 절이라 하여 법주사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넓은 경내에는 국내 유일의 목탑인 팔상전을 비롯해 쌍사자석등, 석련지 국보 3점과 사천왕석등, 대웅보전등 보물 12점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은 사찰이라고 한다. 특히 ‘석조’나 ‘철확’은 예부터 속리산의 규모와 인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는 문화재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다. 아랫부분에 10㎝ 정도의 구멍이 있어 실제 물을 담아두는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확은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된 거대한 쇠솥이다.

높이 1.2m, 지름 2.87m, 두께 10.8㎝로 신도 3만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해 배식했다고도 전해진다. 실제 절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이곳에 머무르는 스님만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하다. 창건한 스님은 분명 불법을 모신다고 했는데, 지금 경내를 찾는 이마다 눈길을 두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물론 문화재에 담긴 유구한 역사를 보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과 들을 줄 아는 귀가 더 필요해 보이는 오늘날이다.

법주사를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 수십 점의 국보와 보물 못잖은 법주사만의 보물을 발견했다. 그 보물은 시시각각으로 모양이 변했고 수도 늘어났다. 만드는 이도 지금까지 수천 명, 아니 셀수가 없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마애여래의좌상이 새겨진 큼직한 바위 아래 계곡을 따라 쌓인 수백 개의 돌탑이 그 주인공이다. 돌탑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간절하게 쌓아 올린 사람들의 바람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보물이다. 이 모든 소망을 품어주는 속리산 너른 품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07.jpg
속리산 계곡에 쌓인 수백 개의 돌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