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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오롯이 담은 그곳,


照見堂

조견당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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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김종길가옥 고택 조견당의 모습. 흰 눈으로 덮인 조견당의 모습이 한층 더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교훈 삼아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다. 비단 이 말 속에 담긴 뜻이 그 하나뿐일까. 전통은 불편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만연한 작금의 시대에, 기자는 그 말 속에서 하나의 뜻을 더 찾아내 본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의 ‘법고창신(法古創新)’.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나 그 말들 속에는 역사 없이는 오늘도 내일도 없듯, 옛것이 없고서야 새것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은 아닐까. 옛것 즉 전통이 터부시되는 지금 이 말을 그저 가볍게 흘려들을 수만은 없다.


옛것이 모여 전통이 되고 그 전통들 속에서 문화재가 탄생한다. 문화재란 무엇인가. 문화재의 사전적 의미는 ‘고고학·선사학·역사학·문학·예술·과학·종교·민속·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 활동의 소산(所産)’이다. 한마디로 말해 인류가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그 ‘무엇’들 중 특별히 더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그 ‘무엇’인 것이다.

문화재는 그 중요도와 지정 주체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으로 분류된다. 이 중 문화재자료는 시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 또는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은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시도조례에 따라 지정한 ‘문화재’다.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문화재의 경우 한번 지정되면 특별한 결격 사유- 화재 등의 이유로 소실돼 그 원형을 알 수 없는 경우처럼-가 없는 한 지정 해제되는 일이 흔치 않다. 헌데 그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1985년 1월 17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 있는 고택 조견당(照見堂)은 지정 21년만인 지난 2016년 10월 14일 문화재에서 지정 해제되는 된서리를 맞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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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온(五蘊)
불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을 합쳐 부르는 말로 색(色, 육체·물질계)·수(受, 감정·감각과 같은 감수작용)·상(想, 심상·표상·개념등 표상작용)·행(行, 수·상·식 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식(識, 인식 판단의 작용, 주체적인 마음)의 다섯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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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당의 특징인 ‘화방벽’. 음양오행 사상이 담겨있다. 사람이 기단 위에 올라 서면 천지인 사상이 된다.
 



비추어 보는 집, 조견당
영월김종길가옥(寧越金鍾吉家屋)의 당호 조견당(照見堂)은 <반야심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인 ‘조견오온 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에서 따왔다. ‘비추어 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무엇을 보든 선입견이나 사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라’는 집주인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는 당호다.

조견당은 1827년(순조 27) 상량을 올렸다. 3년에 걸쳐 40칸으로 지으려던 것이 9년에 걸쳐 120칸 이상을 짓는 대공사가 됐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했을 때나 강원도라는 지리적 요건만 따져 봐도 결코 쉽지 않은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집을 지으신 분이 7대조 할아버지세요. 집을 지을 당시를 생각하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해요. 떠도는 유민들이 넘쳐나고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었을 때죠. 그때 강원도 영월 주천강가에 사는 김 부잣집이 집을 짓는다고 하니 일이라도 해서 곡기를 때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든 거죠. 살기 위해 온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고, 어른이 일하면 거기에 딸린 아이들까지 다 밥을 주고 하다 보니 처음 30~40명이 시작했던 일이 300명이 넘었다고 해요. 한마디로 그들의 생계를 책임진 거나 다름없었죠.”

현재 조견당을 지키고 있는 10대손 김주태 선생의 설명이다.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10년 가까운 세월을 집을 짓고 그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지다보니 결국 재원이 바닥나기에 이르렀다. 집안에 있던 돈 궤짝을 강가에 가서 쏟으며 더 이상 남은 돈이 없음을 보여주니 그때서야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재원은 떨어졌어도 집을 유지해나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무역업으로 돈을 번 10대조 할아버지(김낙배)에 의해 이룬 부(富)가 바탕이 됐다. 목재, 약재, 잡곡 등을 소금, 독, 새우젓 등과 물물교환하며 이룬 부를 자자손손 대를 이어 이웃과 나누며 사는 이른 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10대조 할아버지께서 숙종 때 당쟁에 휘말리면서 숙청의 칼날을 피해 처음 가신 곳이 강원도 원주 근처의 귀례라는 곳이었어요. 3년 정도를 그곳에서 숨어 사시다가 원주로 나왔지만 빈털터리에 인맥도 없으신 분이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게 쉽지 않으셨죠. 그때 만난 어떤 이가 추천한 ‘좋은땅’이 바로 이곳 주천이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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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조견당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합각. 각각 해, 달, 별을 상징한다.
 



주천 땅으로 거처를 옮긴 그의 10대조 할아버지는 양반이라는 신분을 과감히 버리고 중인이라는 실리를 택했다. 가업은 대물림됐고 갈수록 재산은 늘어갔다. 10대조 할아버지의 증손자이자 김주태 선생의 7대조 할아버지는 이곳 주천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이곳에서 대대손손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3대가 함께 살아갈 집이 필요했다. 조견당 탄생의 시작이다.

김주태 선생의 어머니께서 시집오셨을 당시만해도 큰 문과 작은 문 6개를 지나야 안채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주변에는 이중삼중으로 행랑채, 사랑채, 별당이 들어섰고, 소나무숲과 강물도 집 사이를 흘렀다고 하니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를 상상케 한다. 일대 비경을 자랑했을 조견당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상당수가 파괴되고 지금의 안채만이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조견당 일대의 소나무를 벌목하고 제방을 쌓으면서 물이 한 쪽으로 흐르자 주변에 있던 집들이 불어난 물로 다 없어졌어요. 물이 흐르지 않는 쪽은 농토가 돼버렸고요. 1940년도 이전의 조견당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는데 말이죠.”

나라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조견당의 주인은 제살 궁리만 하지 않았다. 나라는 잃었으나 배움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땅 11만 5500㎡(3만 5000평)를 학교 부지(敷地)로 내놓았다. 10대조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바로 아래 땅이다. 그렇게 1919년 12월 1일 학교가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도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비추어 보는 집’이라는 뜻처럼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베풂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고 내 식구처럼 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역사회의 경제와 문화 나아가 교육까지도 책임졌던 곳, 그곳이 바로 조견당이었다.



2. 합각(合閣)
팔작지붕에 생긴 삼각형 부분을 말한다. 그래서 팔작지붕을 합각지붕이라고도 하며 합각을 마감하는 재료는 매우 다양하다.

3. 사괴석(四塊石)
벽이나 돌담 또는 화방을 쌓는데 쓰는 육면체의 돌

4. 카라반
사막이나 초원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지방에서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먼 곳으로 다니면서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



그곳에 가니 해·달·별이 있더라
고택 조견당에 가면 숨어 있는 해, 달, 별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해, 달, 별을 어찌 집에서 찾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우주의 이치’가 이 집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주태 선생에 따르면 조견당은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지어졌다. 그 예로 그는 이 집의 ‘합각(合閣)’과 ‘화방벽’을 들었다. 이 둘은 ‘조견당’만의 특색이기도 하다. 합각은 주로 벽돌로 마감하거나 세로로 판재를 대 마감한다. 물론 와편을 쌓아서 마감하거나 다양한 문양을 장식하기도 하는데, 음양오행 사상을 담아 조형한 집은 조견당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지붕 동쪽 합각에는 해를 조형했다. 해(양)가 뜨는 동쪽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쪽 합각에는 달(음)이, 북쪽 합각에는 별이 장식돼 있다. 해, 달, 별 주변에는 와편을 깨 장식했는데 이와편은 우주와 구름을 상징한다. 즉 우주에 떠 있는 해, 달, 별의 이치를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이 해와 달을 받치고 있는 사괴석은 두 단으로, 별은 세 단으로 쌓아 차이를 두었다. 이를 두고 김주태 선생은 “당시 집을 지으신 할아버지께서 해와 달보다 북극성(별)이 더 높고 귀하다고 생각하셨던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우주의 가장 큰 별을 북극성이라고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쪽 합각 아래 벽을 보면 더 희한하다. 아니 예쁘다. 흙벽에 쌓은 사괴석의 색깔이 저마다 다르다. 가만 보니 ‘청·백·적·흑·황’ 다섯 가지 색이다. 동서남북중앙을 뜻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색채인 오방색의 벽돌을 다듬어 ‘화방벽’을 만든것이다. 오방색의 사괴석 위에도 우주를 상징하는 와편과 우주 안에 들어 있는 해, 달, 별이 조형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해와 달은 가까이에, 별은 저 멀리 떨어져 조형돼 있는 점이다.

북극성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다. 이 집에 숨은 뜻을 듣고 다시금 바라보니 화방벽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채 겨울이 빗겨가지 않아 새하얀 눈이 고택 전체를 덮은 탓에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중에 조금 일찍이 만난 봄이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예요”라며 김주태 선생이 화방벽 앞에 올라선다. 천지인(天地人) 사상이다. 발은 땅을 밟고 머리 위에는 해, 달, 별 곧
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으니 참으로 우주의 이치가 이 집에 오롯이 담겨 있구나 싶다.

조견당 만의 특색이자 자랑할 만한 것이 또 하나있다. 바로 안채의 지붕을 받치는 ‘대들보’다. 대들보는 작은 보에서 전달되는 하중을 받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를 건너지르는 보를 말하는 것으로 보통은 대들보 위에 종보가 하나 더 있는데 조견당에는 그 종보가 없다. 대들보가 워낙에 우람하고 크다 보니 굳이 종보를 덧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누구는 집안의 대들보”라는 말처럼 ‘대들보’는 그 집을 지탱하고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기에 대들보 감을 구하는 데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됐다. 주천 지역에서는 대들보 감을 찾지 못해 몇 년에 걸쳐 수소문한 끝에 충북 제천에서 드디어 대들보로 쓰기에 손색없는 소나무를 찾았다. 그렇게 찾은 소나무를 요즘으로 치면 카라반을 구성해 석 달 동안 야영을 하며 30명의 인부가 집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대들보로 올릴 당시 소나무의 수령이 800년이었다고 하니 1000년이 다 되어 간다.

“대들보를 한번 보세요. 지붕 쪽으로 둥글게 휘어져 있죠. 대들보가 하늘 쪽으로 올라가 있으니 위에 종보를 댈 공간이 사라진 거예요.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거죠. 이런 형식의 대들보는 대한민국에 이 집밖에 없어요. 이 소나무가 궁궐로 갔다면 궁궐의 대들보로도 손색이 없어요. 이 집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다듬어 가공했을 뿐이지 원래 그 모양으로 갔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소나무였을 거예요.”


대들보를 올리고 1827년 드디어 상량문을 올렸다. 대한민국 고택 650가구의 문화재 중에 상량문이 있는 집이 200집이 안 된다고 한다. 김주태 선생의 말에 따르면 상량문이 있고 100년 이상 되면 ‘문화재’로서 손색이 없다. 상량문을 보면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있을뿐더러 그 집의 특징과 문화, 역사 등을 알 수 있어 문화재로 고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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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환경경제인포럼’ 회원들이‘ 국민문화유산 보물 제1호’로 지정된 조견당을 다함께 축하하고 있다.
고택 조견당의 상징인 대들보. 상량 당시 대들보로 사용된 소나무의 수령이 800년이었다고 하니 100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사람을 품었던 조견당
사람들 외면에 문화재 해제
조견당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300년, 집을 짓고 200년을 살아오면서 사람을 품지 않은 적이없다. 집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갈 곳 없어 굶주린 유민들을 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땅까지 내주며 교육에 힘을 실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들이 주둔한 탓에 폭탄을 맞아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돼 안채만이 남았을 때도 이웃을 살폈으며, 전쟁 후 모두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베풂에 인색하지 않았다. 조견당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 인심도 변했는지 지금은 마을 주민 대다수가 “문화재로 지정된 조견당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실정이다. 계속되는 민원 속에 결국 고택 조견당은 ‘상당부분 변형되어 문화재자료 지정 가치 상실’이라는 이유로 2016년 10월 14일 문화재자료에서 지정 해제됐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지방문화재의 경우 문화재 주변 300m 이내는 문화재법에 의거 건축 상의 불이익을 당한다. 건물을 하나 지으려고 해도 규제받는 게 많다보니 감수할 게 많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문화재’가 못내 성가신 존재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모든 문화재를 해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 고택 조견당이 명품 고택으로 선정돼 고택체험 등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가중됐다. 이들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200년 된 한옥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1947년에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수십 칸인 사랑채와 33칸 행랑채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며, 혈세로 사랑채와 행랑채를 신축해 고택 체험 민박영업을 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문화재자료 지정 해제를 요구해 왔다. 더불어 안채인 김종길가옥을 제외하면 일반 한옥에 불과하며, 안채마저도 붕괴 위험이 있다는 주장을 앞세웠다.

이와 관련 조견당 측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사랑채와 행랑채도 고증과 주민들의 인우보증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며 “안채 지붕을 마무리하는 합각마다 사괴석과 와편으로 해와 달, 별, 구름, 땅을 상징하는 문양을 넣은 것과 오방색 돌로 화방벽을 만들어 음양의 조화를 맞춰지은 것 등 ‘조견당’은 문화재적 보존 가치가 높다”고 반론하기도 했다. 김종길가옥의 훼손과 붕괴위험에 대해서는 “2010년도에 보수할 때 잘못해서 기와를 너무 높이 올리는 바람에 내려 누르는 힘이 세졌다. 그 힘에 못 이겨 2013년에 와서 집이 기울어지게 됐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고택문화재의 경우 개인 재산이지만 문화재로 지정되면 국가나 지자체가 관리하게 된다. 집의 훼손 정도에 따라 보수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지방문화재의 경우 지자체에 있는 것이다. 물론 개인이 집을 잘 돌봐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것은 개인이 혼자 관리하기 어려운 부분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자, 후대에 남겨 우리네 옛 생활상과 문화 등을 알리겠다는 뜻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보수를 잘못해 집이 기울어 졌다면 다시 보수해서 그 원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도 문화재 관리 주체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이유로 영월군에서 2000만원 예산을 들여 안전진단 용역을 준 결과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도에 있는 담당공무원이 현장실사 후 도비 2억, 영월군 3억 총 5억 예산을 들여 2015년도 빠른 추경에 조경당 안채를 완전히 해체해서 다시 세우자는 합의에 이르게 됐다. 결론적으로 구의원들의 예산 반대와 주천 출신 군의원 3명이 있는 군의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조견당은 지난해 10월 문화재자료 지정 해제에까지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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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환경경제인포럼’ 회원들이‘ 국민문화유산 보물 제1호’로 지정된 조견당을 다함께 축하하고 있다.
 


문화재란 본시 어느 한 사람만이 지켜야 할 몫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가꾸고 돌봐야 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이자 문화이며 역사이다. 문화재 지정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겪는 어려움과 불편은 문화재 소유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국가와 지자체 등 관련 기관이 나서서 불편에 따른 보상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해 봐야 한다.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턱 괴고 앉아 형식적인 행정만으로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방만한 문화재 관리와 표심을 우려한 공무원 행정으로 인해 문화재가 천대받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 비단 조견당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방문화재의 경우는 대부분 같은 입장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다시는 조견당과 같이 문화재가 지정 해제되는 일이 없도록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문화유산보존운동본부(상임대표 용덕중)’를 만들었다.

한국문화유산보존운동본부는 국민들의 힘으로 소외받는 문화재를 지키자는 의미로 지난 2016년 10월 21일 문화재 관련 관계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문화환경경제인포럼’을 개최하고 조견당을 ‘대한민국국민문화유산 보물 제1호’로 지정하는 지정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조견당 안양순(증손부) 대표에게 ‘조견당 현액’을 전달했으며, 한민족독도사관 관장 천숙녀 시인이 쓴 시조 <숨터 조견당> 자작시 낭송과 ‘크로스오버아트컬 류 예술단’의 <바람칼> 공연도 진행했다.

각기 종사하는 일은 달라도 대한민국의 문화재를 우리의 손, 국민의 손으로 지켜나가자는 뜻은 하나다. 문화재가 하나 사라지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박물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이제 이들은 조견당을 시작으로 국민이 지키는 ‘대한민국국민문화유산’을 하나 둘 늘려갈 계획이다. 나라가 국민을 지키는 것이 아닌 국민이 나라를 지키는 일.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에 작으나마 힘을 보탠다





숨 터 조견당



                     천숙녀 시인



추녀 끝 뭉친 햇살 펼치면 역사의 장場
퇴락이 글썽이는 뜰인들 긴 탑돌이
혈통을 안고 누워서 구르는가 꿈꾸는가

천년 꿈 배인 자락 물빛도 다사로워
기왓장 사이사이 잡초로 돋고 지며
이백년 이어온 고택이름 대들보로 세웠다

오뉴월 소쩍 울음 한 움큼 쥐고 와서
굽은 산허리에 쏟아놓는 들국 향기
걷다가 뒤돌아봐도 아 여기는 내 삶의 터

어느 해 가뭄엔가 무너진 논밭두렁
꿈꾸듯 일어서서 받쳐 든 하늘가에
우리들 생애를 펼친 주천강의 목울음 소리

가려다 되돌아서 발붙인 산새들아
둥지에 남은 온기 여명으로 풀어내며
조견당 청·적·황·백·홍 이름을

너와 함께 부르리니
분분히 날리던 무성한 말들 가슴팍에 문신하고
동강난 상처마저 손등으로 문지르며
어둠 속 숱한 날들은 청사로나 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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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크기에 따라 벽의 크기가 정해진다. 180m 정도의 공간이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문들로 장식됐으나 산만지하 않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