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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시작하다
 
가야의 탄생은 하늘로부터 시작됐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그렇다. 설화의 골자는 하늘의 신과 가야산신이 만나 아들을 뒀고, 두 아들이 가야국을 이루는 시조가 됐다는 것이다.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수로왕릉의 비문에 따르면 태초는 가야국이 도래하는 그 시점이다. 태초 이전의 세계를 가리켜 ‘왕은 없지만 인륜이 있는 상태라고 했는데, 이 문장을 통해 가야 이전의 사회는 질서가 잘 이뤄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있다. 이 세계에 하늘의 아들들인 이진아시와 김수로가 들어왔다. 9족장이 지배하는 9간에서 6가야 체제로 바뀌었다.

이진아시 왕과 김수로 왕의 어머니, 정견모주의 이름에서 재밌는 점을 찾았다. 먼저 정견모주다. 정견(正見)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중의 한 덕목이다. 특이한 점은 정견모주가 존재하던 1세기 초엔 불교가 유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서기 372년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때다. 정견모주란 명칭은 후대에 붙여졌을 가능성이높다. 혹자는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이 가야에 들어오면서 남방불교도 유입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견모주와김수로 왕이 하늘의 신을 모셨던 것을 감안한다면 쉽게 개종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가 절을 처음 세운 시기는 허황옥이 들어온 지 500년 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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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나라 가야
 
정견모주와 이비가지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일본 역사서를 통해서도 초기 가야가 불교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천신 이비가지는 일본식으로 ‘이히고(伊日者)’ 곧, ‘이서국의 제사장’이라는 의미다. 신라에 복속된 이서국 왕족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국을 세웠고 이비가지가 이히고로 발음된 것이다. 여러 역사서에 서술된 정황상 이비가 지는 하늘의 신이고, 정견모주는 이서국의 후예로서 제사장 역할을 한 여인이다. 이서국은 글마루 22호(2012년 6월호)에서도 말했듯 제사장 나라다. 제사장 나라, 이서국을 계승한 것이 가야국이라는 것을 볼 때 가야국의 남방불교 전래설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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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에는 정견모주와 더불어 김수로 왕의 아들 일곱 명이 생불이 되었다는 칠불봉(七佛峯)이 있다. 이처럼 가야국은 왜 불교국가라의 이미지가 강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서국과 마찬가지로 가야국 역시 신라에 복속돼 모든 명칭이 불교식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여섯 가야 중 대가야만이 끝까지 가야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다. 금관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고 다른 네 가야는 이미 신라에 복속됐다.
대가야는 홀로 가야의 정신과 문화를 꿋꿋이 지켰으나 점점 쇠하는 국운을 막지 못했다.

대가야에 불교가 유입된 시기는 마지막 혈통인 월광태자가 있을 즈음으로 보인다. 월광태자의 아버지는 가야국의 이뇌왕(異腦王)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伊飡)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다. 가야와 신라의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나라 신라가 적대적으로 변하자 월광태자는 즉위하지 못하고 말년을 쓸쓸히 보냈다. 그는 가야산 남쪽에 월광사라는 절을 짓고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즈음부터 해서 신라가 가야국의 모든 역사와 명칭을 불교식으로 바꾸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만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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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만물상’ 보이는 대로 보인다

가야산 곳곳에 가야국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가야국의 시조인 이진아시 왕과 김수로 왕의 부모인 이비가지와 정견모주가 만난 곳, 김수로 왕의 일곱 아들이 생불이 됐다는 곳, 가야 부족국 시대부터 쌓아올려졌다는 가야산 산성 등이 그 예다.

성주군 쪽에서 출발해야 가야산의 진면모를 볼 수 있다. 이 만물상 코스는 지난 2010년 일반인에게 38년 만에 공개됐다. 이 길은 초입부터 힘들다. 약 70도의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다 보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사방으로 펼쳐진 산경을 놓치고 가지 말자. ‘만물상 코스로 산을 탈 때엔 앞만 보지 말고 반드시 옆과 뒤를 보라’라는 말이 있다. 해학적인 바위들, 빽빽이 선 나무들 모두 눈과 마음에 담으니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것도 점점 줄어든다. 절정으로 힘든 길은 서장대까지 오르는 길이 아닐까 싶다. 서장대는 상아덤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곧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풀이된다. 신을 만나기 위해 높디높은 이곳까지 제물을 운반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서장대엔 제물을 반듯하게 놓을 만한 평평한 곳이 없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 험한 곳까지 올라와 빌고 빌었을까’란 생각하게 된다. 이곳에서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인 이비가지를 감동시켜 두 아들, 이진아시 왕과 김수로 왕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형 이진아시는 아버지를 닮아 해처럼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불그스레해 뇌질주일(惱窒朱日)이라고도 불렸다. 아우 김수로는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하늘과 같이 푸르스름해 뇌질청예(惱窒靑裔)란 이름이 붙여졌다.
 
가야산의 정상은 소머리를 닮은 우두봉(牛頭峯)이지만 최고봉은 정상보다 3미터 높은 칠불봉(1443m)이다. 우두봉과 칠불봉의 거리는 10여 분이지만 각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서로 다르다. 칠불봉에서는 각양각색의 바위들을, 우두봉에서는 푸르름을 볼 수 있다.

합천군 방향으로 오르는 산길은 성주군보다 비교적 여유롭다. 하지만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성주군은 길이 가파르고험한 대신 만물상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합천군은 길이 험하지 않지만 단조로운 길이 이어지다 보니 낙(樂)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도 합천군 쪽에서 오르면 천년고찰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이 소장된 해인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암자들을 감상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석학 최치원이신발과 갓, 지팡이를 두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홍류동 계곡역시 합천 쪽에서 오르는 코스에 있다.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제자리에 있을 가야산. 먼 훗날에도자신이 간직한 자연과 가야의 이야기를 덤덤히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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