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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던 만큼 평화를

노래하는 땅

DMZ train으로 만나다


글, 사진. 김일녀
사진제공. 철원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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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적지
 


아픔이 많은 땅이다. 이 산 꼭대기에도 저 강물에도, 드넓은 들판에도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비극이 전해진다. 광복 후 분단과 함께 북한 땅으로 넘어갔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그어지며 두 동강이 난 강원도 철원. 그만큼 평화의 바람도 간절하다.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의 완충지대)와 맞닿아 있어 무장한 군인들과 방벽들이 도로 곳곳을 막아서는 낯선 풍경이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곳. 매섭게 몰아치는 철원의 칼바람이 이 땅의 아픔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온 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기차가 있다. 우선 겉모습을 보면 기차가 기차를 덧입었다. 영화에서나 봤던 검은 증기기관차가 1호차에 그려져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로 잘 알려진 녹슨 증기기관차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2, 3호차에는 동서양의 아이와 어른들이 손을 맞잡고 늘어선 모습이 표현돼 있다. 마치 열차를 둘러싸고 강강술래를 하는 듯하다. 내부는 볼거리가 더 많다. 평화를 상징하는 바람개비 무늬 의자에 풍선 가득한 천장, 연못 위를 걷는 듯 느껴지는 연잎 바닥까지 모두 약간의 적응시간이 필요할 만큼 알록달록하다. 언뜻 보면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다. 풍선은 자유와 희망을, 연잎과 연꽃은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핀 연꽃을 나타낸다고 한다. 벽면에는 평화, 사랑, 화합을 뜻하는 각 나라 언어가 빼곡하다. 창문 위쪽 두 뼘 남짓한 공간도 평화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하다. 한국전쟁 당시 모습과 DMZ 관련 사진 등이 쭉 펼쳐져 있는데, 한장 한 장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렇듯 ‘평화’라는 두 단어를 온 몸으로 전하고 있는 이 기차, 흔히 ‘평화열차’로 불리는 DMZ tra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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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을 향한 철마의 외침
DMZ train은 용산역에서 임진강역을 거쳐 도라산역까지 가는 경의선과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백마고지역까지 가는 경원선, 두 관광열차 코스가 있는데 주 단위로 번갈아 가며 운행을 한다. 이번 답사는 백마고지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일반 기차를 타듯 플랫폼을 확인한 후 출발 시간에 맞춰 열차에 올랐다. 중간 중간 청량리, 의정부, 동두천역 등에서 정차하는 통근열차이기도 하다. 승차한 지 1시간 정도 지나자 2호차 스낵바에서 승무원이 승객들을 대상으로 핸드페인팅 이벤트를 진행했다. 재인폭포와 전곡 선사박물관 등 연천의 명소를 구경하고 싶다면 백마고지역 바로 전 역인 신탄리역에서 내려 연천시티투어를 이용하면 된다.

서울역에서 2시간 넘게 달려 백마고지역에 도착했다. 역명은 인근에서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에서 따왔다. 기차는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철제판에 적힌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바람처럼 여기가 경원선 철도의 남쪽 중단점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신탄리역이 중단점이었으나 지난 2012년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열차가 이곳까지 달릴 수 있게 됐다. 다만 신탄리역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신탄리역 근처에도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푯말이 남아 있다. 100여 년 전 개통돼 서울에서 원산(元山)을 오가며 동해안 북부의 자원을 실어 나르고 동서를 연결했던 경원선. 하지만 남북 분단으로 남측 구간은 백마고지역에서 군사분계선까지 16.2㎞, 북측 구간은 군사분계선에서 평강까지 14.8㎞가 끊어진 상태다. 이 31㎞가 다시 연결되면 금강산은 물론 서울에서 최단거리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이어져 유럽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휴전선 이남의 마지막 역이지만 언젠가는 북으로 향하는 첫 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긴 분단의 세월 앞에 북녘을 향한 철마의 외침이 허공을 치듯 느껴진다.

백마고지역에서 40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 대의 관광버스에 올랐다. 겨울방학을 하루 앞두고 왔다는 동두천의 한 중학교 학생회 소속 학생들과 선생님을 비롯해 대부분 삼삼오오 단체로 온 경우가 많았다. 가족 또는 혼자 온 외국인 관광객도 있었다. 철원에서 나고 자랐다는 문화관광해설사 한 분도 함께했다. 본격적인 안보관광을 시작하기 전 철원읍 대마리의 두루미평화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예부터 유명한 철원 오대쌀 등 철원산 농산 물로 지은 밥상이라며 해설사의 자랑이 넘쳤다. 딱 집밥 같은 맛이었다. 민통선(민간인 통제구역)과 맞닿은 마을 대마리, 해설사에 따르면 백마고지 아래 마지막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회관의 외관 또한 여느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인데, 근처에 있는 노동당사의 건물 구조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노동당사는 해방 후 북한 노동당이 사용하던 건물로, 러시아식 건축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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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train 내부
 


죽음을 각오했을 그들의 기도
관광버스를 타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1952년 10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중공군은 철원의 한 이름 없는 야산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침 주인이 달랐고 저녁 주인이 달랐다. 10일간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 공중에서 보니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여 ‘백마고지’라 불리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양측에서 총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발 395m에 불과한 이름도 없는 이곳에서 세계 전사상 유래 없는 고지 쟁탈전이 벌어질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만큼 작전상 중요했다. 고지에 올라서면 사방이 훤히 보여 철원, 평강, 금화를 잇는 중부 전선 일대 적의 경로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였던 것이다. 여기에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양 국가의 명예를 건 일전으로 변해 더욱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결국 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현역 군인의 안내를 받으며 전적지 곳곳의 설명을 들었다. 입구부터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양쪽으로 도열하듯 심겨진 자작나무다. 백마고지라서 하얀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자작나무 앞쪽으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봉에 태극기가 일렬로 꽂혀 있는데, 마치 자작나무 허리춤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듯 보였다. 전적지를 둘러보기도 전에 숙연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자작나무와 태극기의 도열 아래 위령비로 향했다.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국군 844명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 백마고지에서 가져온 현무암으로 세워져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바로 앞에는 일병부터 소령까지 전사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전사자비가 세워져 있다.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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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역에 있는 철도중단점 표시
 



기념관은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의 유품과 당시 전투에 사용됐던 유물 등이 전시돼 있고, 백마고지 전투와 12차례의 공방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안내판도 있다. 특히 두 기념관 모두 동판으로 만들어진 전투 상황도가 전시돼 있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용된 탄피를 모아 주조했다고 한다. 기념관을 나서니 입구에서도 보이던 기념비가 늠름하게 서 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간절하게 생(生)을 바라기보다 죽음을 각오했을 기도, 이 땅의 군인이었기에 그리고 군인으로서만 할 수 있는 기도였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기도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나 또한 짧은 기도를 올렸다. 더 이상 전시로 인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기도는 없게 해달라고…. 기념비를 지나 전적지 끝에 이르면 왼쪽으로 펼쳐진 평야 건너편에 백마고지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빠진 머리털이 듬성듬성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전쟁의 상흔을 치유해가고 있는 백마고지가 안쓰럽고도 기특했다. 아이스크림고지도 백마고지처럼 전쟁으로 지형이 바뀐 곳이다.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백마고지 왼편의 삽슬봉도 폭격을 하도 맞아 산세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듯 하여 아이스크림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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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사
 


우리의 현실과 마주하다
이어 일행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철원노동당사’.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전쟁이 나기 전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의 철원군 당사다. 북한 당국은 공산치하 5년간 이곳에서 철원, 포천, 연천 일대 등을 관장했다.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고도 전해진다. 3층짜리 건물로 지붕과 내부는 모두 파괴됐고 외형만 그나마 남아 있다. 러시아식 건축법으로 지어져 이국적인 모습이다. 시멘트와 벽돌만으로 지어졌고, 철근은 건물 중앙 부분에 삐죽하게 튀어나온 2가닥이 전부다. 전체적으로 균열이 심해 곳곳에 철기둥을 받쳐놓았다. 여기저기 포탄과 총탄 자국이 가득하고, 건물 앞쪽 계단에는 탱크가 지나간 흔적도 남아 있다. 당시 이 일대는 인구 3만 명이 살던 철원 시가지였으나 전쟁으로 모두 파괴됐고, 유일하게 이 건물만 남았다고 한다. 1990년대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며 ‘발해를 꿈꾸며’라는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으로 잘 알려졌다.

다음 목적지는 입구부터 긴장감이 전해졌다. 해골마크가 그려진 표지판 때문이다. 말로만 들었던 백골부대, 이곳의 멸공OP를 방문했다. 멸공OP란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밖에 설치한 관측소를 말한다. 우선 작은 강당에서 군부대 소개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이 끝나고 설마 이게 전부인가 싶어 실망하려던 찰나, 암막커튼이 걷히고 비무장지대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철원의 추위가 느껴지는 청록의 한탄천과 한겨울을 맞은 비무장지대, 실제 북한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건천리마을과 영화 <고지전>으로 유명한 오성산과 저격능선, 남방한계선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축소 모형과 하나하나 비교하며 유심히 살폈다. 일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름들이기에 그저 신기한 눈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현실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곳이다. 모형판 중앙에 동서로 이어진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가 말없이 수십 년간 품어 온 이곳은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이어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으로 향했다. ‘끊 어 진철 길 ! 금 강 산 90 키 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또박또박 알려주고 있는 이 교량은 1926년 세워졌다. 총 116.6㎞, 시발역은 철원역, 종착역은 내금강역이다. 내금강까지 4시간 반이 걸렸는데, 요금은 당시 쌀 한가마 값인 7원 56전.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연간 15만 4000여 명(1936년)이 이용했다고 하니, 90여 년전 먹고 살 걱정 없던 이들은 쌀 한 가마니를 팔아 이 전철을 타고 금강산 구경에 나섰던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지하자원 수탈에 이용됐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의 군수물자 수송에 사용됐다. 교량은 그리 길지 않다. 목재발판으로 이어진 교량 끝부분에는 전기철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녹슨 구조물만이 매서운 강바람에 쓰러질 듯 덩그러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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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203호 재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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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
 


마지막 코스는 월정리역이다. 월정(月井)리, 말 그대로 달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먼 옛날 이 마을에 효성 지극한 딸이 있었는데, 꿈에서 만난 달의 화신이 시키는 대로 집 옆 바위에 고인 우물 천 모금을 길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월정리역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과 가장 근접한 역으로, 경원선이 잠시 쉬어가던 간이역이었다. 198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복원했다. 역 뒤편에는 6·25전쟁 당시 탈선한 열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만 드러낸 채 스러져 있다. 철 구조물임에도 녹슬 대로 녹슬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문화해설사의 말대로 이번에 본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DMZ, 아이러니하게도 평화 그 자체
이곳저곳 다니는 동안 버스 안에서는 생태관광이 이어졌다. 창밖이 곧 철새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바로 눈앞에서 두루미, 재두루미, 기러기는 물론 독수리까지 끊임없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두루미 가족을 마주할지 몰라 창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딱 이런 한겨울,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기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이른바 ‘두루미 자는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는 강둑을 따라 보호막이 설치돼 있었다. 사람들의 접근으로부터 철새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강을 바라볼 수 있는 보호막 바로 뒤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작은 오두막이 세워져 있었다. 창문도 작게 뚫려 있다고 한다. 이는 겨울철새를 촬영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장소다.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두루미를 보면 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에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부모님 효도 관광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는 게 해설사의 농담 섞인 진담이다. 이곳은 청정지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무장지대이기 때문이다. 비록 비극의 역사로 인해 인위적으로 조성됐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연생태의 보고가 됐다. 생태계 입장에서는 평화 그 자체인 셈이다. 여기에 현무암이 풍화된 비옥한 토양은 강원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철원평야를 만들었다. 철새들이 겨울을 나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중간 중간 지나치는 출입통제 초소에서는 짧은 초코파이 전달식이 이어졌다. 민통선에 들어오기 전 어머니들이 군인들 간식으로 주겠다며, 특히나 외진 곳에 있는 아들들에게는 꼭 줘야 한다며 샀던 것이다. 무심한 듯 받아든 저들이 똑같이 아들 자식 둔 어머니들의 마음을 알아줄까.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시 백마고지역에 도착했다. 4시쯤 서울역으로 향하는 평화열차에 몸을 실었다. 철원의 아픔을 짧은 시간, 한꺼번에 보고 듣고 느껴서일까. 온몸이 녹아내리듯 힘이 풀렸다. 기차의 덜컹거림 마저도 아늑하게 다가왔다. 아픔이 서린 차디찬 바람이 평화의 바람을 만나 위로받을 날이 머지않아 찾아오기를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