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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史

비밀 간직한

몽촌토성


글, 사진. 박선혜
사진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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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마한의 승인 아래 변두리 땅을 빌어 생활해 나가다가 마한을 병합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백제가 자리 잡았던 지역은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의 북쪽 경계 지역에 해당되는데,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립한 시기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의 말이 맞든 아니든, 백제 건국초기의 중심 역할을 했던 성곽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몽촌토성은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서울 지역 한성 백제시대의 비밀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자 백제가 남긴 유산이다.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을 두르고 있는 나지막한 산 능선. 송파구 주민들의 산책로가 되어 주고, 분주했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콧바람을 쐬고자 하는 이에게 마음의 여유를 선물하는 곳, 바로 ‘몽촌토성(夢村土城, 사적 제297호)’이다.

몽촌토성은 낮은 구릉에 쌓은 백제 때의 산성이다. 한강변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낮은 야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쌓은 ‘토성’으로, ‘산’이면서 ‘성’이라 할 수 있다. 토성이 되기 전에 불리던 산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성 이름마저 사라져 망월봉(望月峰), 몽산(夢山), 몽촌(夢村), 고원강촌(古垣江村)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지금의 몽촌토성이라는 이름은 ‘몽촌’이라는 마을에 있는 흙으로 쌓아서, 혹은 그 마을이 가까이 있어서 부르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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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목책
 



‘88 서울올림픽’ 계기로 1500년 만에 빛 보다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은 1988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이 일대에 체육시설을 만들게 되면서 부터다. 유서 깊은 서울의 역사를 전 세계에 홍보 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더욱 부각됐고,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1983년부터 올림픽 체육시설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착수되었고, 이때 몽촌토성 발굴지 보호구역을 위한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1989년까지 6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성의 규모와 축조방법, 내부시설물, 출토 유물 등이 하나씩 밝혀졌고 몽촌토성의 전체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성과를 거뒀다. 이로써 백제 패망 이후 옛 이름을 잃은 채 세월의 오랜 무게를 힘겹게 간직해오던 몽촌토성은 150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몽촌토성은 발굴 시작 당시인 1983년에는 강동구에, 1988년에는 강동구에서 분리된 송파구에 편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강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쌓은 성

몽촌토성은 순수 토성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표고 44.8m의 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구릉을 다듬어서 급경사면을 만들고, 구릉이 끊기거나 낮은 부분에는 흙을 쌓아 성벽의 모습을 갖춰 만든 성이다.

성벽의 축조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해당 구역).
1) 자연 구릉 가운데 다른 지점보다 낮은 부분은 *판축해 높게 함(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 일부)
2) 구릉이 연결되지 않은 지점은 서로 떨어진 구릉 말단부 사이에 판축 성벽을 쌓아 이어지게 함(북문지 양벽)
3) 성벽 바로 안쪽 네 지점에는 주위보다 3~5m 정도 높게 판축해 토단(土壇, 흙으로 만든 제단)을 만들어 *망루 역할을 하게 함
4) 성 외벽은 자연 구릉의 경사면을 깎고 다듬어서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성벽 외측 경사면에 목책(木柵;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을 설치함. 이경사면과 단은 성벽 정상부에서 기저부까지 2~3회 되풀이 되다가 *해자와 만남
5) 외성(外城)의 북쪽 경사면은 본성의 외벽과 같이 인공을 가했고,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함
6) 현재의 성벽 전체가 한꺼번에 축조된 것은 아니며, 후대에 증축이나 개축이 이루어진 부분도 있음(북문지 서벽과 동벽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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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서북지구 발굴조사(2014년)-서울 지역에서 처음으로 통일신라시대 마을, 우물, 도로유적이 드러나면서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 문화층이 차례로 존재한 것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둠
 



이처럼 자연 구릉을 이용해 판축한 성이므로 성벽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제일 높은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30m 내외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릉 자체가 한강변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여서 성내천이나 한강이 크게 범람하지 않는 한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는 요새로 적합한 곳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지점은 서북쪽 봉우리로, 나무가 무성한 곳이지만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장점이 있다. 이곳에 오르면 석촌동, 잠실, 풍납동 등 성 서쪽과 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 당시에는 한강 이북지역까지 훤히 조망할 수 있었을 법하다.

한성백제의 최후, 그리고 몽촌토성
한성백제 최후의 날은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475년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왕도 한성을 포위했다. 미처 준비가 안 된 백제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근초고왕 이후 계속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우위를 보였던 백제였다. 하지만 고구려에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까지 압박해 내려왔고 남한강 유역까지 밀고 내려가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웠다.

고구려군이 밀려오자 백제 개로왕은 태자 문주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는 백제에게 1만의 군사를 지원했다. 하지만 신라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고구려군은 한성을 덮쳤다. 한성은 포위된 지 7일 만에 무너졌다. 개로왕은 급하게 왕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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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구에서 출토된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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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축(版築)
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서 단단하게 다져담이나 성벽 등을 쌓는 일
*망루(望樓)
방어·감시·조망을 위해 잘 보이도록 높은 장소에, 또는 건물을 높게 하고 사방에 벽을 설치하지 않은 건물
*해자(垓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고구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 이후 계속해서 백제를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백제를 어떻게 하면 무너뜨릴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장수왕 앞에 승려 도림이 나타났다. 도림은 백제에 첩자로 갈 것을 청했다. 장수왕은 도림이 죄를 짓고 도망하는 것처럼 백제로 들어가게 했다.

도림은 바둑을 잘 두었다. 바둑 두기를 잘했던 개로왕은 바둑을 잘 두는 도림과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할 정도로 극진히 대했다. 도림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질 대로 두터워진 개로왕은 그의 주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구릉과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하늘이 베풀어준 요새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형세가 아닙니다. 이웃 나라들이 감히 대왕의 나라를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섬기기에 급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땅히 왕께서는 기품있는 기세와 부요한 사업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성곽은 정비되지 않고, 궁실은 수리되지 못한 곳이 많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 위에 임시로 묻혀 있고, 백성들의 가옥은 번번이 강물에 허물어지니 저는 차마왕을 위해 이런 것들을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림의 말에 개로왕은 부끄러워 당장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고, 화려한 왕궁 도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대규모 공사로 나라의 창고는 바닥이 났고, 백성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불안한 나라 상황을 틈타 고구려 장수왕이 3만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밀고 내려왔다. 결국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최후를 맞았다. 도림의 개략에 한성이 함락된 것이다. 장수왕은 휘황찬란한 백제궁을 불태우고 아름다운 연못은 흙으로 메워 버렸다. 백제왕들의 무덤을 파헤쳐 금·은 부장품들도 모조리 꺼냈다.

고구려와 백제군이 모두 사라진 몽촌토성 곳곳에서 뒹굴고 있는 백제 토기와 고구려 토기들이 그날의 치열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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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활동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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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3호도로 전경
 



삼국시대(고구려·백제·통일신라) 포장도로 확인

고구려가 한성 백제를 점유하고 활용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면서 오래전부터 제기됐던 부분이다. 지난해 11월 발굴조사에서는 고구려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와 성토(盛土)대지, 수혈유구 등이 확인돼 그 가능성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당시 발굴조사를 통해 몽촌토성 북문지 안쪽에서 삼국시대 포장도로 5기와 수혈유구(竪穴遺構, 지면에서 곧게 내려 판 굴모양의 터) 18기, 구상유구(溝狀遺構, 고랑 모양의 터) 1기가 확인됐고, 북문지 바깥에서는 삼국시대 도로 1기, 통일신라시대 도로와 함께 수레바퀴·사람·소 발자국 흔적 등이 분포한 생활면 유구 등도 확인됐다.

5기의 삼국시대 도로는 격자상으로 구획된 포장도로다. 특히 북문지의 문도(門道)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1호 도로는 백제가 최초 조성한 후 그 위에 한 차례 더 도로를 개설해 사용했던 중층(中層, 중간 층)도로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성백제박물관 발굴조사팀은 “이곳은 북쪽 측구(側溝, 도랑)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진행하는 또 다른 도로와 측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개의 도로
가 3개의 노면으로 이루어진 1로 3도(1路 3道)일 가능성이 크다”며 “백제가 사용한 하층도로와 중층도로를 고구려 역시 증개축(增改築)해 사용하는 등 시기별로 총 세 차례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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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
목이 짧고 입이 곧은 항아리로, 4~5세기 대한성 백제기 중앙양식을 대표하는 백제 토기
 



아울러 1호 도로는 북문지 바깥으로 이어져 풍납토성(북성)으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백제와 고구려시대 토기 등의 유물도 다수 출토됐는데, 그중에서도 7호 수혈유구에서는 백제 토기 *직구단경호의 어깨부분에 ‘관(官)’이라는 글자를 좌서(左書, 왼쪽과 오른쪽이 바뀐 글씨)로 찍은 조각이 나왔다. 이 ‘관(官)’ 자명 토기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 ‘대부(大夫)’ 명 토기와 같은 기종인 직구단경호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몽촌토성에 대한 장기적인 발굴조사와 연차적인 연구조사를 통해 2000년 전 백제 왕도인 서울의 백제 역사를 복원하고 조명해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