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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

소통의 중심에 서 있다


글. 김일녀
사진. 연합뉴스, 뉴시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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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화첩 <금강내산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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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터에서 발견된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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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드디어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미·소 양국에 의해 이 땅에 38선이 그어지며 국토도, 국가도 그리고 민족도 두 동강이 났다. 분단 71년. 그 질곡의 세월은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만들고, 커지는 이질감은 이제 두려움을 넘어서 체념에 가까워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길게는 수십만 년 전부터 짧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전통 문화유산이다. 물론 세월의 풍파에 외관상 모습은 변했을지 모르나 그 속에 깃든 반만년 역사와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영어로 코리아(Korea), 프랑스어로 코레(Corée), 독일어로 코레아(Korea), 러시아어로 까레야(Корея), 아랍어로 코리(Korii)… 이는 세계 각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부르는 말이다. 모두 ‘고려(Korea)’에서 유래했다. 1천 년 전 고려청자, 고려인삼 등 우리나라의 우수한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고려. 그만큼 고려는 대외적으로 개방적인 정책을 폈다. 송나라와 활발히 무역했고, 거란·여진족 등과도 많은 교류를 했다. 그래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은 늘 외국인으로 북적였고, 송·요·금나라 사신을 위한 숙박 시설도 따로 마련돼 있었다. 특히 개경 근처 벽란도는 당시 국제 무역 항구로서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도 무역하기 위해 송나라를 거쳐 이곳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이 고려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고구려와 고려 그리고 그 이전 한민족의 원시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북한이다. 우리 역사(삼국유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국가 ‘고조선’이 자리 잡은 곳도, 고구려에 이어 고려의 도읍지였던 평양과 개성도 지금의 북한 땅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시작점이자 뿌리가 되는, 이곳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문화재, 이 중 적어도 역사·문화적으로 의미가 깊은 몇몇은 알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1960년대 북한 평양 부근에서 발견된 검은모루동굴유적은 한반도 땅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를 말해주는 유적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알려진 구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약 40~60만 년 전)의 것이다. 이곳에서 사냥해 잡아먹고 버린 30여 종의 동물 뼈 화석을 비롯해 주먹도끼 모양의 석기, 제형의 석기, 뾰족끝 석기, 반달모양석기 등이 발견되면서 인류의 한반도 정주시기를 수십만 년이나 끌어올렸다. 흔히 우리의 역사를 ‘반만년 역사’라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이른 50만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고조선.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남만주의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살며, 우세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정치 세력을 정복하거나 통합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에 고조선 문화를 흔히 ‘비파형동검 문화’라고 한다.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고인돌 등의 무덤이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유적이다. 특히 탁자식 고인돌은 요동지역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우리나라 국보 1호가 ‘숭례문’이라는 것은 누구나다 아는 사실이다. 북한의 국보유적(국보) 1호는 무엇일까. ‘평양성’이다. 준국보유적(보물급) 1호도 평양성 북성의 북문인 현무문이다. 평양은 427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만큼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평양성은 총 길이 23㎞에 궁궐이 있던 내성, 관청이 있던 중성, 백성들이 살았던 외성 그리고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지역이었던 북성으로 구성됐다. 특히 이 평양성을 중심으로 북한의 대표적 문화유적들이 밀집해 있어 그 가치가 남다르다.

평양 안학궁 터(국보유적 제2호)는 광복 이후 북한에 있는 역사 유적을 남북(서울시·고구려연구재단-김일성대학)이 처음으로 공동 발굴한 유적이다. 여기서 고구려 성터와 와당이 발견돼 안학궁이 고구려 시대의 것임이 입증됐다. 안학궁은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중국 지린성 지안현(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뒤 건립한 궁성이다. 궁터가 자리 잡은 대성산의 형세가 학이 편안히 쉬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안학궁이라 이름 붙였다. 지금은 빈터만 남았지만, 전체 면적이 약 38만㎡(가로, 세로 각 600여m)에 달하는 삼국시대 왕궁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됐다.

고구려인들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 예술적 창의성 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화재를 꼽으라면 단연 고분 벽화일 것이다. 벽화의 이름은 잘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그리곤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을 고구려 고분 벽화. 안약3호분의 ‘행렬도’, 무용총의 ‘무용도’,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사신도’ 등 대부분 약 2000년 전 그림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화려하며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붉은색 또는 갈색 계열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인데, 고구려인들은 갈색이 ‘재생’을 의미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무덤 벽면에 갈색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무덤에 묻힌 사람의 재생을 빌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은 100여 기에 달한다. 중국 지린의 지안 지역에 24기가 있고, 나머지 70여 기가 북한 평양과 남포, 황해도 일대에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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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
 



고구려인을 설명할 때 흔히 ‘고구려인의 기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이는 중국 지린성에 있는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를 보면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수렵도는 말 그대로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물결치는 산봉우리 위쪽으로 두 마리의 사슴이 다리를 쭉쭉 벌려 도망가고 있는데, 이를 향해 달리고 있는 말에 탄 장정이 활시위를 힘껏 당겨 겨누고 있다. 사슴이 지나간 자리에는 쌩하니 바람이 분다. 그림 아래쪽에도 달리는 말에 탄 장정들이 활시위를 겨눈 채 호랑이등 산짐승들을 쫓고 있다.’ 이렇듯 산등성이 사이사이로 쫓고 쫓기는 모습이 역동적으로 표현돼 실제 사냥하는 모습을 보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그 문화유산은 수도였던 개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성시 송악산 남쪽에 자리 잡은 ‘만월대’는 고려 태조 왕건이 정무를 보며 거처로 삼았던 궁궐터다. 400여 년간 고려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던 만월대는 1361년 공민왕 때 홍건적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돌계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다. 개성 문수산에 있는 태조 왕건릉에서 발굴된 왕건상은 매우 이례적인 문화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금의 신체를 그림이 아닌 조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태조가 앉아 있는 모습을 실물 크기로 제작했다고 하며, 특히 옷을 입지
않은 나상(裸像)이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다만 발굴 당시에는 왕건상의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얇은 비단과 금도금을 한 청동 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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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북한에 있는 문화재를 친밀도 순으로 꼽는다면 ‘선죽교’는 상위권에 속할 것이다. 고려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시절,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이방원의 ‘하여가’에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 그 뒤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 선죽교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으나, 정몽주가 죽고 난 뒤 그 자리에 참대나무가 자라났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 한다.

이렇듯 고려왕조의 지배근거지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구성된 ‘개성역사유적지구(12곳)’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앞서 2004년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에 이은 북한의 두 번째 세계유산이다.

예로부터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말이 전해진다. 송도는 개성의 옛 이름으로 ‘송도에서 가장 뛰어난 3가지’란 뜻이다. 즉 박연폭포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서경덕, 명기 황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높이 20여m에 이르는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조선 3대 폭포로 불린다. 또 겸재 정선이 그린 박연폭포는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와 함께 정선의 3대 명작으로 손꼽힌다. 박연폭포 앞쪽 바위에는 황진이가 박연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조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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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특히 이산가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산이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판이하게 바뀌는 경치 덕에 별칭도 여럿이다. 봄에는 금강, 여름에는 봉래(蓬萊), 가을에는 풍악(楓嶽), 겨울에는 개골(皆骨)로 불린다.

열반산(涅槃山), 기달산(怾怛山)이라는 이름도 있다. 하지만 마음대로 갈 수 없어 이름만 들어도 그립고 그리운 산, 바로 금강산이다. 사시사철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국내외 많은 문인·화가들의 예찬의 대상이었다. 유물·유적은 사찰이 대부분으로, 곳곳에 유서 깊은 사찰과 석탑·불상·불당·암자 등이 많다. 유점사·신계사·장안사·표훈사 등 삼국시대 창건된 사찰이 많았으나, 대부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 표훈사만 남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도 금강산에 있다. 고려시대 바위에 새긴 묘길상(아미타 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15m, 얼굴 높이 3.1m에 손발 길이도 3m에 이른다. 지난 1998년 말, 드디어 분단 50년 만에 바닷길을 통해 관광이 시작되며 우리에게 금강산이 한층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현재 모든 관광이 잠정 중단된 상태다.

여전히 그립고 그리운 금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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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자락. 2014년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설경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지정된 국보유적 제193호 북관대첩비는 남북 모두에게 그 의미가 남다른 문화재다.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승전비로, 1905년 러일전쟁 때 강제로 일본으로 옮겨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됐었다. 이후 한 연구자에 의해 북관대첩비가 발견됐고, 반환운동이 펼쳐졌다. 비문에 이름이 기록된 의병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남북 민간단체가 함께 반환을 추진해 결국 지난 2005년 일본으로부터 환수받았다. 1차로 그해 10월 한국에 반환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됐다가 2006년 3월 개성으로 인도돼 함북 길주군에 다시 세워지며 제자리를 찾게 됐다.

남북 간 문화재 교류를 위한 협력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미미하게나마 이뤄지고 있다. 특히 개성 만월대는 지난 2007년부터 남북(국립문화재연구소-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발굴 조사를 추진한 유적으로, 2015년까지 모두 7차례 조사가 진행됐다. 그간 남북관계의 분위기에 따라 발굴이 중단되기도 하고, 재개되기도 하며 지난해에는 발굴 조사 이래 최장기간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로써 고려시대 유물 1만여 점 발굴과 각종 건물 배치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2013년부터는 고구려 고분에 대한 공동 조사도 추진 중이다.

지금은 오늘을 바로 보고 내일을 준비할 때다. 민족의 염원이자 당위적 과제인 통일에 앞서 분단으로 훼손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 그 숙제 앞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결책 중 하나가 문화 교류다.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제대로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요, 기본이 아닐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말이다.



금강행(金剛行)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데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요

이 몸이 스러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댄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랏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과져

- 이은상(李殷相)의 시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