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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문화재를 되찾다

약탈문화재 환수,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글. 백은영 사진. 글마루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깨뜨린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그 일을 이뤄내고자 하는 열정, 인내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의미다.
신념이라는 것. 그것은 마치 기적과도 같다.
그 신념의 결정판 중 하나를 꼽자면 36년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이뤄낸 민족의 광복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한 번의 광복을 부르짖고 있으니 민족의 정체성
즉 정신을 회복하는 광복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왜곡된 역사와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돼야 할 부분임에도, 사실 정부보다는 민간단체가 주축이 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국가 간 예민한 부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탁상행정에 머물러 있는 정부 관련 부처보다 역사 의식이 있는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좋은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민간단체 중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단체는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다. 이 단체의 대표 혜문은 지난 2004년부터 10년간 ‘환지본처(還之本處: 본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와 ‘파사현정(破邪顯正: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란 불교 사상에 입각, 문화재 제자리찾기와 세상 잘못 50가지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 결과 ‘조선왕조실록 47책 환수’ ‘조선왕실의궤 환수’ ‘대한제국 국새 반환성공’ 등 다수의 약탈 문화재 환수 및 세상 잘못 50가지 바로잡기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단체 및 개인, 정부의 노력으로 환수에 성공한 약탈문화재 및 앞으로 환수해야 할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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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4월 14일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서 출발한 외규장각 의궤 75권(1차분)이 아시아나항공 여객기(OZ502편)를 통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조선왕실의궤’

2006년 9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조선왕실의궤환수위’가 구성된 지 4년 만인 지난 2010년 8월 10일, 일본 총리 칸 나오토는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담화를 발표하게 된다.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여기에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 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하여 반출되어 일본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 이른 시일에 이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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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궤’ 환수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의 단체가 4년여의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활동해 온 토대 위에 만들어진 민족사적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4년의 시간 속에는 남북한 불교계, 시민단체, 정치권, 일본의 양심세력 등이 한일 간의 왜곡된 역사와 미진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과정도 있었다. 당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이었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를 향해 ‘실질적반환요구’를 할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간이 나서서 정부가 하지 못한 일들을 해결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일본 궁내청으로부터 환수한 조선왕실의궤 81건 167책은 약탈된 지 약 100년 만인 2011년 12월 6일 조국의 품에 안겼다.

이 외에도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이 약탈한 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外奎章閣) 의궤도 145년만인 2011년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의궤는 지난 197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고(故) 박병선 박사가 파리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시절 베르사유 분관에 폐지로 잠자고 있던 것을 발견해 총 190종 297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처음 반환을 요청, 외교부 등의 끈질긴 노력으로 20여 년에 걸친 프랑스와의 협상 끝에 ‘영구임대’ 형식으로나마 반환될 수 있었다. 이 또한 문화재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과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왕실의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록유산으로 조선왕조 500여 년간의 왕실 의례에 관한 기록물이다. 왕실의 중요한 의전절차를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다.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으며, 2007년 국내에 소장돼 있던 3430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왕의 귀환, 대한제국 국새 환수

2014년 4월 25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대한제국 국새 황제지보(皇帝之寶)를 비롯한 9점의 조선왕실인장을 전달했다. 한 나라의 수장이 직접 약탈문화재를 들고 와 반환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로, 세계 문화재 반환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시민단체가 펼친 작전명 ‘응답하라 오바마-왕의 귀환’ 프로젝트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국새가 어떻게 미국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인가.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뒤 황제국의 권위에 맞게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를 용으로 변경하는 등황제지보를 비롯한 국새를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1907년에는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순종에게 전달됐으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면서 조선총독 데라우치에 의해 일본 궁내청으로 보내지게 된다. 왕의 상징이자 국권의 상징을 빼앗긴 것이다. 이후 1946년 8월 15일 맥아더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미군정청 하지 중장을 통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바라 마지않는다’는 친서와 함께 황제지보를 비롯한 대한제국 국새를 돌려줬으나, 6·25전쟁 중 다시 분실된다. 미군이 종묘와 궁궐에서 국새를 훔쳐간 것이다.

대한제국 국새 반환, 그 중심에는 역시 또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의 시민단체와 미주 동포들(한인사회), 의식 있는 몇몇 국내 정치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대한제국 국새의 반환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여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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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4월 25일 오바마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한 대한제국 국새 황제지보(왼쪽)와 고종황제의 존호 ‘수강(壽康)’이 새겨진 수강태황지보(오른쪽)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2010년 미국 메릴랜드에 위치한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미국 국무부 관리가 작성한 전쟁 중 서울에서 발생한 ‘미군의 문화재 절도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아델리아 홀 레코드’로 불리는 이 문서를 통해 전쟁기간 중 미군이 ‘임금의 도장’을 훔쳤고, 한국 정부가 47개의 옥새를 워싱턴의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분실신고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후 미국 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새의 흔적들을 조사하던중 LA카운티 박물관에 조선 8대 임금 중종의 왕비 어보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수년에 걸쳐 ‘문정왕후 어보’ 반환을 위해 노력했다. 2013년 9월 박물관 측은 6·25전쟁 당시 분실된 도난품을 인정, 한국으로 반환하겠다는 발표를하게 됐다”고 전했다.

대한제국 국새는 LA카운티 박물관이 조선왕실의 옥새를 반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 미국 골동품상이 또 다른 옥새의 행방을 신고하면서 우연찮게 발견됐다. 용의자의 집을 수색한 결과 9점의 옥새가 추가 발견됐는데, 바로 그중에 행방이 묘연했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 ‘황제지보’가 있었다.



남북도 하나 된‘ 북관대첩비’ 환수운동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있는 ‘북관대첩비’도 환수된 문화재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로 높이 187㎝, 너비 66㎝, 두께 13㎝로 1500자가 새겨져 있다.

1707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웠던 것을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후 반환될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돼 있었다. 2005년 반환됐으니 100년 만의 귀환이다. 북관대첩비 또한 환수 과정에서 민간단체의 공이 컸다.

사람들에게 잊힌 북관대첩비는 1978년 재일 한국인이자 한일 관계의 권위 있는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우연히 야스쿠니 신사에서 발견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한국 정부가 일본에 반환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2005년 3월 28일 한일불교복지협의회가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만나 최종적으로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반환하기로 합의한다.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된 후 2006년 2월 13일 남북 간에 북관대첩비 북조선 환송에 관한 협의를 거쳐 3월 23일 북관대첩비가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또한 반환 기념으로 북관대첩비의 복제비를 경복궁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의정부에 있는 정문부 선생 묘역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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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정문부 선생 묘역에 세워진 북관대첩비 복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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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소재 문화재 16만점, 체계적인 조사 필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에 따르면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는 2016년 9월 1일 기준, 20개국 16만 7968점이다. 이 중 일본에 소재한 우리 문화재만 7만점이 넘는다. 해외 소재 문화재의 대다수가 약탈 및 불법 밀반출 등으로 자신의 본래 자리를 잃고 먼 이국땅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아직도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몇몇 문화재를 살펴보자.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현재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노닐었던 광경을 그린 작품으로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몽유도원도’는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우리 문화재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데는 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다는 증거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구한말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 대리공사가 사들인 책과 미술품에 포함됐던 직지심체요절은 1911년,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의 손에 들어간다. 이후 앙리 베베르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게된다. 기증 당시 중국과 일본 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프랑스 국립도서관 연구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발견,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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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1일 열린 외규장각 의궤 반환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고(故) 박병선 박사
 



해외문화재 중 42%가 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 그곳에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간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 오쿠라와 오구라다. 그들이 수집한 문화재 목록을 일명 ‘오쿠라(大倉)컬렉션’과 ‘오구라(小倉)컬렉션’으로 부른다.

‘오쿠라컬렉션’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1928)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한 문화재로 현재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에 소장돼 있는 문화재를 말한다.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 지석탑이 대표적이다. ‘오쿠라컬렉션’의 경우 개인이 소장한 사유재산이다.

반면 ‘오구라컬렉션’은 일제강점기에 남선합동전기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오구라 타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96~1964)가 1922년부터 1952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수집해간 유물 1100여 점을 지칭한다.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다.

지난 1965년 한일회담 당시 오구라컬렉션은 한국 측이 가장 인도 받고 싶어 하는 문화재였으나 개인소장품이란 이유로 인도 문화재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컬렉션은 그동안 오구라 타케노스케가 창설한 재단법인 오구라컬렉션 보존회에서 관리해오다가 그의 사후인 1981년 아들 야스 유키(安之)에 의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됐다.

‘오구라컬렉션’ 가운데는 여러 정황상 도난품임이 분명한 조선 대원수 투구와 경주 금관총 유물, 오구라가 1964년 작성한 목록에서 ‘민비(명성황후)가 죽은 곳(경복궁 건청궁)에서 가져왔다’고 기술한 주칠 12각상 등 34점도 포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