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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君師) 되기를 자처했던 王 정조,

효심 지극한 ‘개혁군주’의 꿈!

‘화성(華城)’에 스며들다


글. 박선혜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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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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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 앞에서 바라본 것으로 동북포루(왼쪽)가 보인다.
 


‘조선의 개혁 군주’라 불리는 제22대왕 정조. 왕세손부터 동궁을 거쳐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순탄치 않았던 인물이 바로 정조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왕이 된 정조는 유학에서 이상적인 사회라 일컫는 삼대(三代)의 군주상인 ‘군사(君師;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존재)’를 실천했던 왕이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꿈을 다 펼치진 못했지만, 그가 남긴 ‘수원화성’을 통해 ‘개혁군주 정조’의 큰 뜻을 엿볼 수 있다.

태풍이 북상한다며 떠들썩했던 7월 초, 장맛비가 한풀 꺾이고 태양이 유난히 뜨겁게 내리쬐던 날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수원화성’으로 향했다. 수원 시민은 수시로 가볼 수 있고 도심에서 자주보니 감흥이 없겠다 싶지만, 수원화성을 TV나 사진으로만 접하던 이들에게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고, 잠재되어 있던 역사의식이 깨어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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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孝心)과 욕망을 동시에 충족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장헌세자, 고종 때 ‘장조’로 추존)의 능침을 배봉산(현재 동대문구)에서 당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정조 10년에 전교하기를 “…본 도는 용천의 읍치에서 백리의 거리이고 백성의 취락에서는 일사(30리)의 거리이다. 그러니 또 어찌 가까운 곳을 살피고 먼 곳을 생각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제 소위 이자니 치통이니 하는 것은 결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 …本島距邑治爲百里距民聚爲一舍 則又何爲而察近思遠耶 今所謂移咨馳通之說 決知爲知一未知二也”고 했다.

또 정조는 “고 처사 증 집의 겸 진선 유형원은 그가 지은 <반계수록보유>에서 말하기를 ‘수원 도호부는 광주 아래 지역인 일용면 등지를 평야지대로 옮기면, 지세를 따라 읍성을 쌓을 수 있다.

읍치의 규모로 말한다면 평야가 매우 훌륭하여 참으로 큰 번진의 기상이 있는 지역으로서 안팎으로 만호를 수용할 수 있다. / 故處士贈執義兼進善柳馨遠 其所撰 <磻溪隨錄補遺> 曰 水原都護府 以廣州下道之一用等面 移治於坪野臨川 因勢邑城可築 申之以邑治規模 坪野大勝 眞是大藩鎭氣像 地內外可容萬戶(정조실록 권제38, 61장 뒤쪽, 추관지 고율부 속조 범월, 정조 17년 12월 10일 기사)”고 전교했다.

아버지의 능을 옮기는 동시에 읍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정조가 품었던 조선의 개혁 정치는 시작됐다. 즉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요,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가 바로 수원화성이다. 또 화성이 위치한 지리적 특징은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도 매우 훌륭했다.


읍치
고을 수령이 일을 보는 관아가 있는 곳. 여러 가지 환란(患亂)에 대비하기 위해 길지(吉地)를 택해 성(城)을 쌓고 그 안에 옮겨 설치함. 진보(鎭堡) 및 창고가 함께 설치되는 관방(關防)의 요충지로서 중시되었으며, 능묘(陵墓)를 왕실의 주변에 조성하는 일도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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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문
 


동서양 최고 기술 종합한 계획도시 ‘화성’


수원화성을 마주하면 규모에 한 번 놀라고, 각 건물마다 평범하지 않은 생김새를 하고 있어 또 한번 놀란다. 성벽을 둘러 성 밖과 성 안의 구분을 확실하게 하고, 정교하면서도 높이 쌓아 올린 건물구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화성은 1794년 2월에 착공해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됐다. 성곽은 전체 길이가 5.74㎞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 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축성하는 데는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정약용이 건축을 위해 새롭게 고안한 기계를 이용했으며, 이 기계 덕분에 큰 규모의 석재를 옮기고 쌓을 수 있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큰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도 여럿 있었다.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이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부속 시설물로는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됐다. 화성 역시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돼 없어졌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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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가지를 배경으로 화홍문(왼쪽)과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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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심돈
 



‘독특한 구조’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

수원화성은 성벽 위를 걸으며 과학적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답사하던 날에도 선두에서 이끄는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수원화성 야외 수업 중인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토록 찬란한 유산을 남긴 선조의 지혜에 감동이 일었다.

탐방팀은 동쪽을 지키는 창룡문부터 출발해 북쪽과 서쪽을 잇는 성곽을 따라가 보았다. 창룡문에서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둥근 원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동북공심돈’이다.

공심돈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을 말하는데, 화성에서 처음 등장했다. 적의 동향을 살피는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화성에는 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이 있는데 1796년(정조 20) 7월 19일에 완성된 동북공심돈은 화성 성곽 내에서 가장 특징 있는 건물의 하나다. 내부에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오르게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또 다른 공심돈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은 같은 해 3월 10일, 동북공심돈보다 앞서 완공됐는데, 1979년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이곳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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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다. 무예 수련 공간이라는 뜻의 ‘연무대’라고도 불렀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있지 않아도 사방이 트여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피기에 좋은 곳이다.

화성 건축물들의 생김새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감탄이식을 줄 모른다. 특히 암문이 그렇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이곳을 통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했다.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있는데, 동암문은 암문 위에 벽돌을 깔고 커다란 둥근 담장이 설치된 구조이며, 1796년(정조20년) 3월 25일에 완공됐다.

‘동북각루’라 불리는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도 시선을 빼앗았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18) 10월 19일에 완공됐는데,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가 함께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나다. ‘방화수류’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으로, 정자의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사방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화성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는 이곳은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서북각루를 지나자 ‘서일치’와 마주했다. ‘치’는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로,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치’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면서도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 이름 붙였다.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는데, 서일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니 ‘이렇게 독창적인 구조로 어떻게 쌓아 올렸을까’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궁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듯 당시 화성 공사 현장을 축소해 재현해 놓은 곳을 만났다. 공사에 쓰인 기구(축소 모형)와 사용법(푯말) 등이 이해를 돕는다.

특히 ‘화성’하면 정약용의 ‘거중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거중기는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로, 지금의 기중기와 비슷하다. 위와 아래에 각각 4개씩의 도르래를 연결한 후 그 끈을 물레에 감아 당기면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어 화성 축성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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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내 ‘봉수당’
 



능원 참배 때마다 찾은
‘화성행궁(華城行宮)’


1789년(정조 13) 수원에 새로운 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지은 화성행궁은 규모와 기능면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휴양을 목적으로 한 온양행궁은 조선 세종 이래 역대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다.

정조는 1789년 10월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했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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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뒷담 우측에 있는 ‘내포사’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에는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해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했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의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가 1980년대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 운동을 펼쳐 1996년 복원 공사를 시작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을 완료하고 2003년 10월,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화성행궁 앞 넓은 광장은 정조 시대에 다양한 *위민정치(爲民政治)와 문화 행사가 이뤄진 공간이다. 백성과 하나 되고자 했던 정조의 ‘위민(爲民)’이 느껴지는 곳이다. 현재 광장은 ‘수원화성문화제’ 등 대표적인 지역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되며, 지역 주민의 휴식 공간으로 항시 개방되어 있다.



위민정치
정치에 있어서 통치자나 통치권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의 법제나 시설은 백성을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철저한 민본주의의 위민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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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세계문화유산 등재 그리고 오늘의 화성

수원화성의 독창성은 진작부터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으면서 전 세계로 알려졌다.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는데, 당시 유네스코로부터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해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고 평가 받았다.

특히 등재기준(ⅱ)에서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다. 화성은 기존 성곽의 문제점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포루, 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하고 이를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에 맞게 설치했다. 이 시기에 발달한 실학사상은 화성의 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독특한 성곽의 양식을 결정했다. 화성 축조에 사용된 새로운 장비와 재료의 발달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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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왼쪽)과 화홍문(북수문)
 



또 기준(ⅲ)에서는 “화성은 분지로 이루어진 터를 둘러싸고 산마루에 축조된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과는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됐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 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화성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급속한 사회 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 주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이라고 가치를 인정했다.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수원화성.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지금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도심 속 시가지)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공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철학적 측면과 정조의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개혁을 꿈꿨던 정조의 원대한 꿈은 꽃 피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고이 잠들어 지금의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