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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게 하는 그곳, 서산(瑞山)

백제의 향기가 서리다


글. 백은영 사진. 글마루 제공. 서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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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진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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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형에 반원형의 눈썹, 얕고 넓은 코, 중후한 체구의 본존은 왼손 끝 두 손가락을 구부린 채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지었다.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의미다. 충남 서산 용현리 용현계곡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삼존상. ‘백제의 미소’로 불릴 만큼 자애로운 미소를 안면(顔面) 가득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을 되돌려 십 수 세기 전 이곳에 살았을 백제인과 하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어느 해보다 일찍 찾아온 것 같은 무더위에 지쳐갈 무렵,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남 서산.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여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에서 기자는 그 옛날 백제가 남긴 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 족하다고 했던가. 일상에 지쳐 삶을 압박해오는 어떠한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 그런 잠시의 여유조차 없는 이들에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은 사치일 수도 있겠으나, 언제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당일치기로 힘들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서산을 권하고 싶다. 물론 이 ‘권유’의 한 편에는 ‘백제의 미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포의 기둥, 서산의 가야산


충남 서산은 태안반도에 속해 일찍부터 중국과의 왕래가 잦아 대륙문화 수입의 선진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의 서산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으며, 백제시대에는 ‘기군’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14년(755)에는 ‘부성군’으로 불렸다. 이후 고려 충열왕 10년(1284)에 와서 처음으로 ‘서산’이라 불렸다.

조선시대 최고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 내포(內浦) 지역을 제일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다. 내포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한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개의 현을 지칭한다.

“산천은 평평하고 아름답고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의 세력 있는 집안치고 충청도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다.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만(灣)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내포는 자세가 한 쪽으로 막히어 끊기었고, 큰 길목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임진, 병자 두 난리의 피해도 이곳에는 미치지 않았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넓다. 물고기,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충청 제일의 지역으로 손꼽히는 내포의 중심 서산은 서북부 태안반도에 위치한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이미 백제시대 중국과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지리적 영향으로 해상을 통해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문화가 유입되면서,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백제 불교유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국보 84호 마애여래삼존상, 백제시대 고찰인 개심사를 비롯해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려시대 화엄 10찰 중 하나였던 보원사 터(백제시대 창건) 등 불교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은 일본인들도 인정하는 백제 불교문화의 보물이다.

이 또한 그 어떠한 말로도 형용하기 힘든 삼존불의 미소가 한몫하고 있다. 자애로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가 마치 어린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그것과 닮았다. 그래서인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로 꽤 오랜 시간 마음이 무거웠던 기자 또한 벼랑 끝에 새겨진 삼존불을 바라보며 살며시 그 미소를 따라 짓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 번의 미소로 시름이 떨쳐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삼존불의 신비한 미소를 따라하는 그 순간만큼은 “별 것도 아닌 일에 감정을 낭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니 과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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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삼존상으로 향하는 길
 



큰 마누라, 작은 마누라의 기싸움?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쯤인 1959년 근처 보원사지(보원사 터) 유물을 조사하던 전 부여박물 관장 홍사준 선생에 의해서다. 일생을 백제사 연구에 몸담았던 선생이 유물 조사 당시 우연히 한나무꾼을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이 바로 ‘백제의 미소’를 발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혹시 주변에 부처님을 새긴 것이나 석탑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느냐는 선생의 질문에 돌아온 나무꾼의 대답이 재밌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는디유, 저 인(印)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고만유. 양 옆에는 큰 마누라랑 작은 마누라가 각각 서 있는디유.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을 볼에 대고 실실 웃음서 큰 마누라를 약 올리니께, 그걸 본 큰 마누라가 짱돌을 들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구만유.”

듣고 보니 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에 와서 들어도 나무꾼의 해석이 참으로 재치 있다. 그저 삼존불의 미소를 보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닐까.

한 나무꾼의 해석에 짝 맞춰 설명하자면, 불교에서 산신령은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석가여래로, 큰 마누라는 자비를 베푸는 관음보살 또는 과거의 부처인 제화갈라(提화竭羅)보살로, 작은 마누라는 앞으로 도래할 미륵보살로 본다.

중앙에 있는 본존의 손 모양은 삼국시대 석가여래 불상들이 흔히 취하는 형태로 시무외인(다섯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치고 손바닥을 밖으로 해 어깨까지 올린 형태)과 여원인(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은 밑으로 향하는 형태)을 하고 있다. 본존의 오른쪽에 있는 불상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관을 썼기 때문에 구도 중인 중생(보살)으로 본다. 또 양손으로 보주를 쥐고 있는데 삼국시대 관음보살과 동일한 모습이다. 한편에서는 백제 사람들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알리는 <법화경>에 근거해 불상을 만들었기에 과거의 부처인 ‘제화갈라보살’이라는 해석도 있다. 본존의 왼쪽에 있는 불상을 보면,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팔을 굽혀 오른쪽 볼에 손가락을 살짝 댄 채 깊은 사색에 잠겨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세의 불상은 반가사유상으로 미륵보살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은 빛이 비취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여기서 팁을 하나 주자면, 오전 11시에 보는 마애불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보려거든 오후보다는 오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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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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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당간지주
 




100개의 암자가 있던 대가람 보원사지

마애여래삼존불에서 용현계곡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풀밭이 보인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연녹색을 띤 풀밭과 그 뒤로 펼쳐진 짙푸른 숲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파란 하늘, 그 하늘 위에 몽글몽글 하얗게 수놓인 구름 때문인지 마음만은 시원하게 확 트이는 곳. 바로 보원사지다.

백제시대 창건됐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 초에 크게 융성했던 곳이자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다. 한때는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석조물만 남아 있다.

보원사지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온다. 보물 제103호로 지정된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4.2m로 통일신라 때의 유물이다. 하늘로 쭉 뻗은 모양이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터줏대감 마냥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느껴진다.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보원사지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이 절터에서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발견돼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967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보원사지는 백제와 신라, 고려 초 불교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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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5층석탑
 



또한 백제계의 양식 기반 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석탑(보물 제104호), 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제102호), 975년(광종 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승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전시돼 있다.

보원사지 5층석탑 뒤로 남아 있는 금당 터로 보아 이 탑이 절의 주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금당 터 뒤에는 법인국사 보승탑과 보승탑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보물 105호로 지정된 보승탑은 지대석에서 옥개석까지 팔각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어 팔각원당형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부도로 평가 받는다. 보물 제106호로 978년(경종3)에 건립된 전체 높이 450㎝, 비신 높이 240㎝, 너비 116.5㎝, 두께 29㎝의 장중한 느낌을 주는 보승탑비는 이수의 상부에 용연(龍淵)을 파고,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한 조각이 특이하다.

법인국사 탄문(坦文)은 신라 말·고려 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며,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됐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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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서산9경, 구경하세요


서산을 대표하는 것이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이라하여, ‘백제의 미소’만 보고 간다면 살짝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 ‘서산8경’에 하나를 더해 ‘서산9경’으로 업그레이드 된 서산 구경 한 번 하는 것은 어떨까.

서산9경은, 제1경 해미읍성을 시작으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제2경), 간월암(제3경), 개심사(제4경), 팔봉산(제5경), 가야산(제6경), 황금산(제7경), 서산한우목장(제8경), 삼길포항(제9경)까지 모두 9경으로 돼 있다.

신비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여래삼존상을 재치고 당당히 제1경으로 등극한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성곽으로 사적 제116호로 지정됐다. 본래 해미는 1414년(태종 14) 덕산(德山)에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이곳으로 이설된 뒤 1651년(효종 2)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 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해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으로 <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 군데, 군창이 설비돼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전국 최대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읍성에는 수령이 300년 정도 된 회화나무가 있는데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고 한다. 아직도 고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해미읍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청허정에 오르면 천수만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그 경치가 아름답다. 과연 그 옛날 문인들이 이곳에 올라 시를 읊었을 만하다.

제3경 간월암은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고 송만공 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물이 들고 남에 따라 섬이 되기도 하고, 길이 열려 걸어갈 수도 있는 이곳은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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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전경
 



가야산 줄기 상왕산에 자리한 천년고찰 개심사(開心寺). 서산9경 중 제4경인 개심사에는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명부전, 심검당 등이 있다.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뜻의 개심사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입구에서부터 ‘세심동’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표지가 보인다.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열며 개심사로 오르자는 말이다. 그렇게 입구에서 개심사까지 오르는 길은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요사채로 쓰이는 심검당은 굽은 나무를 그대로 건물에 사용해 자연과 더욱 조화로운 멋을 더하고, 안양루에 걸린 ‘상왕산개심사’라는 현판은 근대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이 또한 자연과 어우러진 멋이 인상적이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볼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서산9경. 벼랑 끝에 서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애여래삼존상을 시작으로 외따로 떠 있는 작은 섬이 되기도 하는 간월암까지, 신비로운 체험과 함께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곳 서산. 올 여름 무더위를 서산이 주는 신비로움으로 식혀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