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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부터 창의문까지 6km 트레킹

眞山‘백악산(북악산)’을 오르다


글. 박선혜 사진. 백은영, 박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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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입구역을 나와 200m 남짓 가로수 길을 걸으니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성문과 마주했다. 혜화문이다. 혜화문을 지나 성북동 주민들의 산책 및 등산 코스를 따라 백악산을 끼고 둘러쌓은 도성과 성문 그리고 창의문까지 이어진 약 6km 백악구간. 군사 시설이 있어 일정 구간은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하다. 수도 한양을 지키고자 둘러쌓은 도성. 지금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곳.

일부 구간의 삼엄한 경비 탓인가. 긴장하며 걸어서인지 어깨에 둘러 맨 카메라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나마 백악산은 높다하는 다른 산들에 비해 비교적 오르기 쉬운 곳이라 다시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여기엔 ‘眞山’의 자태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으려는 내 의지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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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혜화문

조선 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운 혜화문(惠化門). 당시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됐는데, 혜화문은 동쪽을 지키는 흥인지문(동대문)과 북쪽을 지키는 숙정문(북대문) 사이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함경도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혜화문을 통과해야 했으며, 북방 여진 사신들도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한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지금의 숙정문)은 험한 지형 탓에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됐었고, 늘 닫혀 있었기 때문에 혜화문이 양주・포천 방면 즉 동북라고도 부르며, 숱한 사연을 겪고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혜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새 날개 모양의 익공이라는 부재가 결구돼 만들어진 공포 유형으로 출목이 없음)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으며, 대한제국 말엽까지 그 모습을 유지해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문루가 낡아 덜그럭거리자 개축하지 않고 그냥 철거해버려 홍예만 남았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면서 1938년에 홍예마저 허물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530년의 세월을 견뎌온 혜화문은 1994년에 본래보다 북쪽으로 옮긴 자리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 혜화문이 있던 자리는 동소문로 혜화동 로터리와 삼선교사거리 사이다.


혜화문은 하나의 아치형 출입구와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小門: 소문)의 형태다. 육축에는 큰장대석으로 하부를 받치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을 불규칙하게 쌓아 올렸으며, 오른쪽과 왼쪽에 2개의 누조(漏槽: 홈통)를 돌출시켰다. 상부에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한 성가퀴(城堞: 성첩)를 두었으며,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봉황을 그렸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사라지거나 병든 문화재가 한 둘이 아니겠지만, 혜화문처럼 쓴 고통을 감내한 성문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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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을 따라 걷다

혜화문을 지나 성북동 골목 사이사이를 걷다 끊겨 버린 한양도성을 만났다. 도심 속에 공존하고 있는 옛 도성을 마주하니 가슴 한 쪽에서 묵혀오다 썩힐 뻔했던 역사의식이 별안간 깨어나는 듯했다. ‘서울에 옛 도성이 아직 이렇게 남아 있었구나.’

지나온 세월만큼 깎이고 색 바랜 돌들은 성곽 아랫부분에 남아 신식 돌들을 받치고 있고, 그 모습을 보노라면 ‘지금까지 잘 버텨주었구나.’ ‘대견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잠시 끊겼던 성곽이 와룡공원 방향 산책로 초입에서 다시 반긴다.

성북동에서부터 와룡공원으로 이어진 길은 성벽위다. 즉 성벽 위를 걷는 것이다. 그 위를 걸으며 또 문득 드는 생각.

‘정말 튼튼하게 잘 지었구나.’
‘수많은 돌을 쌓느라 많은 사람이 정말 힘들었겠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와룡공원’이라 큼지막하게 세운 입간판 주변 옆에 정자가 보인다. 잠깐의 휴식후 다시 성곽을 따라 걸어 올랐다. 분명히 산맥을 끼고 둘러진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인데 험준한 산을 오르는 여느 산행 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느낌이다. 비 겐 다음날이라 하늘은 청명하고 태양이 눈부실 정도로 뜨겁게 내리쬐니 평일 오후 임에도 북악산 백악구간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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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공원에서 이어지는 한양도성
 




백악구간에는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구간이 있다. 이곳을 통과하려면 창의문안내소나 말바위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간단한 절차 후에 나눠주는 목걸이를 패용해야만 입장할 수 있다. 목걸이를 패용했지만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는 잔뜩 긴장하게 한다. 군사 보호 지역 내에서는 카메라 촬영도 자유롭지 않다. 청와대가 있는 남쪽으로는 절대 카메라를 돌려서는 안 된다. 지정된 곳에서 지정된 범위 내 촬영만 가능하다. 카메라 촬영이 가능한 구간은 숙정문(북대문), 촛대바위, 청운대, 1.21사태 소나무, 백악마루, 백악쉼터, 돌고래 쉼터다. 특히 숙정문은 현존하는 도성의 문 중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유일한 문임에도 성벽이 시작되는 양쪽 지점에 군인 시설인 소초가 있어 성벽이 연결된 모습을 사각프레임에 담을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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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본 숙정문
 



굳게 닫혔던 숙정문(북대문)

숙정문은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 1395년(태조 4)에 원래 숙청문(肅淸門)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됐으나 통행이 제한됐다.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 두 문을 막아야 한다고 청한 것을 계기로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했다고 한다.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했을 뿐만 아니라,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동쪽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사실 동소문인 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데 더욱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에 숙정문으로는 거의 출입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심할 때에는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는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으로, 이러한 풍속은 1416년(태종 16)에 처음시작했다. 풍수지리와 관련해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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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으로 성벽이 유일하게 남은 숙정문(肅靖門) 정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조금 옮긴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때에는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76년 대통령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숙정문은 다락 없는 암문(暗門)이 특색이다.

언제부터 숙청문에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1523년(중종 18)에 <중종실록>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돼 있다. 일각에서는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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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구간 군사 경계 내에 있는 ‘1·21 사태 소나무’ 나무에는 당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1·21사태’로 상처 입은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다. 우리군은 군경합동수색전을 펼치는 등 31일까지 29명을 사살하고, 1명은 도주, 1명을 생포(김신조)하면서 작전은 종료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둘렀고, 1968년 4월 1일에 창설됐다. 사건이 터지고 난 후에 대처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바위안내소부터 숙정문을 지나는 중에도 계속되는 삼엄한 경계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한다. 다행히 군복이 아닌 사복을 맞춰 입어서인지 등
산객을 향해 예의주시하는 눈빛을 빼고는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도 들긴 했다.

숙정문을 지나 한참 후에 도착한 1・21사태 소나무는 의식하지 않으면 지나쳐 버리기 쉽다. 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폭의 길가에 표석과 함께 서 있는데, 소나무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빨간색 원으로 총을 맞은 부위를 표시해 두었는데, 15발의 총탄 흔적을 세어 보았으나 14발인 것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여러 번 세어보았지만 그래도 잘못 센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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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 정상 해발 342m를 알리는 표석
 




백악마루에 오르다


1·21사태 소나무를 지나니 나무계단이 이어지고, 여전히 곳곳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복 군인들에게 속으로 ‘우린 통제에 잘 따르며 가고 있어요’라 말하며, 북악산 즉 백악산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 오르니 백악산 해발 342m를 알리는 ‘白岳山’ 표석이 덩그러니 세워져있다. 이곳 역시 카메라 촬영이 자유롭진 않다. 표석을 찍는 것은 상관없지만, 혹여나 청와대 방향으로 사진을 찍진않을까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들 때문이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수만 걸음을 떼고 올라온 보람은 있다. 북악산? 백악산?…. 산은 북악산인데, 정상을 알리는 표석에는 백악산이라 새겨져 있다. 무엇이 맞는 걸까. 아무래도 추측하건데 산의 형세나 사건, 사연 등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곤 했으니 그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실제로 과거에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부근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하얀 연꽃 봉오리 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백악산’이라 불렀다는 말이 전해 온다. 그리고 산 바로 아래에 조선 왕조의 정전인 경복궁을 터 잡아 짓고 난 후로 한양의 북방 진산이 된다고 해 ‘북악산’으로 부르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백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금강산 줄기가 북한강물줄기를 몰고 내려오다가 그 강 끝에 이르러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산이 있다. 삼각산이다. 다시 삼각산의 서쪽 봉우리에 해당하는 만경대의 남쪽 줄기가 뻗어 내려와 마지막 용솟음쳐 이루어 놓은 것이 바로 백악산이다. 천하제일 명당인 한양의 형세가 백악산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쪽의 낙산은 좌청룡이 되고, 서쪽의 인왕산은 우백호, 남산이 남주작을 이루고, 이들을 거느린 백악산은 북현무에 해당하니 한양(서울)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춘 것이다.

이제, 백악마루에서 창의문안내소에 출입 목걸이를 반납하러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하지만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창의문안내소에서 시작해 혜화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다.

‘眞山’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역사와 함께한 지난 날 그리고 지금도 역사를 쓰고 있는 오늘날에 답이 있다고. 그리고
한양도성을 따라 꼭 한 번 가벼운 트레킹이라도 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