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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扶安)이다.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이 부안에서 꽃을 피우진 않았지만, 그 의미가 부안에 숨어 있어 이 고장까지 발걸음을 했다.
‘도울 부(扶)’에 ‘편안할 안(安)’ 즉 ‘서로 도와 편안한 세상을 이루자’ 곧 하나가 되자는 의미가 부안군에 담겨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 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는가.
 
더군다나 원효대사가 살았을 당시 부안은 백제 영역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 할 것 없이 원효대사의 활동영역은 넓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의 상당수 사찰은 원효가 창건했거나, 얼마간 머무르면서 수도했다거나, 혹은 이적을 펼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부안 우금산에 위치한 개암사 부근에도 원효가 머물었다는 굴, 원효방이 있다. 이처럼 백제 영역에서도 원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종만 원광대 명예교수는 “구백제 지역이자, 경상도 일대와 왕래가 적고 소원했을 전라도 사찰에 유독 원효 관련 설화가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그만큼 원효가 민중과의 친화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 그는 무애(無碍)를 실천했다. ‘없을 무(無)’에 ‘거리낄 애(碍)’. 스스럼없이 민초들의 손을 잡았다. 부처의 가르침 안에서 자유로운 그다. 신라인으로서가 아닌, 수도승으로서 석가의 교리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 천년고찰엔 유독 원효 이야기가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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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617~686)

속명은 설서당 또는 설신당이다. 648년 황룡사에서 출가했다. 650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기 위해 요동까지 다다랐으나 그곳 순찰군에게첩자로 몰려 신라로 돌아왔다. 10년 후 다시 의상과 당나라에 다시 가던 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진리는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내부)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의상과 헤어져돌아왔다.
 
655~660년,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낮추며 박통(무애박, 無碍박)을 치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했다.

노래의 줄거리는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편안함을 얻느니라”는 내용으로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다. 이를 무애가(無碍歌)라고 불렀다. 그의 불교 대중화로 가난뱅이나, 어린이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욀 수 있게 됐다.

원효는 686년 나이 70세, 법랍 38세로 입적했다.
그의 저서는 <금강반야경소> <금강삼매경론><화엄경종요> 등 9부 240여 권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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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채석강. 약 7천만 년 전부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명승지에서 자연의 조화를 느낀다. 아울러 원효가 살았던 시대를 눈감아 생각해본다. 원효가원하는 평화의 세계, 정토는 어떠한 세계이었을까.
 
원효가 살던 시기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삼국의 전쟁이 발발하고 7세기 중엽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통일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게다가 불교는 기득권의 도구이자 액세서리일 뿐이었다. 귀족중심의 불교는 민중이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도(道)였다. 수도승에 내려진 부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바로 ‘중생 구제’가 아니던가.원효는 부처의 가르침이 점점 희석되고 종파마다 외치는 이현령비현령 식의 설파에 염증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속세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무엇이 중생을 구제하는 길인지 고뇌한 다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승복을 벗어던진 원효는 파격적이었다.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며, 백정과 기생을 만나고 마음을 나눴다. 민중의 염원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민중의 시각으로 불교를 설파했다. 그러면서도 산과 물에서 좌선수행을 하고, 길 위 수레를 타고 가면서 글을 쓰고, 불교의 거대한 체계를 집대성하기도 했다.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사는 듯했지만, 그는 일탈이 아닌, 해탈로 살아있는 부처가 됐다.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아상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들에게 원효는 진정한 해탈과 자유의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원효는 당시 지배층과 민중 사이에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들, 삼국 간의 전쟁 갈등을 느끼며, 이를 통합시킬 사상을 찾았다. 바로 일심(一心)이요, 화쟁(和諍)이요, 무애(無碍)였다. 무애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거리낌 없이 속세에 들어가 함께 어울려 부처의 도를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일심은 그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물로 깨달음을 얻은 사상이다. 이른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면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깊은 수심이 어떠한 광풍에도 흔들리지 않듯,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마음 하나 지키면 평화가 곧 온다는 것이다. 
 
화쟁은 모순과 대립을 조화롭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대립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고영섭 교수는 “전체에 대한 통찰이 결여됐기 때문”이라며 “부분을 보고전체를 봤다고 하고,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됐다고 하는 상대적인 이해관계로 생기는 문제”라고 집어냈다. 결국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숲을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냈다. 그래서 통일, 화합, 조화, 평화라는 이상적인 세계에 다다르는 것이 목표였다. 한종만 원광대 명예교수는 “원효를 위대한 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은 당시 누구도 하기 어려웠던 통합의 원리를 제시했기 때문”이라며 “(통합의 원리는)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상극보다는 상생의 결과를 가져오는 귀중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갈등은 늘 존재한다. 상반된 의견으로 다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종교와 이념으로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툼과 반목, 전쟁, 불화는 힘을 분산시킨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힘을 모으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1300년 전 원효는 우리에게 ‘화쟁’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 싸움으로 방향을 잃지 말고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방향을 찾아 나서기를 말이다. 이는 2500년 전의 석가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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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사상의 화는 ‘화합할 화(和)’인데 원효대사는 화에 세 가지 의미를 담았다.
 
말할 화(話) 따지고 싸우고 투쟁하더라도 대화를 나눠야 한다.
 
변화할 화(化) 싸우고 투쟁하더라도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빛날 화(華) 빛날 화, 아름다울 화 즉 싸우고 따지고 다투더라도 끝은 아름다워야 한다.
 
화쟁사상은 ‘너와 내가 서로 같지 않지만 화합할수 있어야 한다’의 의미를 지닌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원효의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과도 통한다. 원융회통은 둥근 원처럼 서로 융합하고 둥근 원 속에서 만나고 서로 통한다는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