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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신라 금관 나와 이름도 ‘금관총’
우리 손으로 다시 조사해 기록 체계화


글/사진 박선혜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의 중심가였던 노서동에서 집을 짓고 있었다. 집주인은 집터의 낮은 곳을 고르기 위해 주변 언덕에서 흙을 파내어 썼다. 그런데 아이들이 파낸 흙 속에서 구슬을 발견해 가지고 놀았다. 이를 우연히 본 일경(일본 경찰)은 흙을 파낸 언덕에서 유물들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언덕은 무덤이었다. 무덤을 조사하던 중 뜻밖에도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수습됐다. 그리고 신라 금관이 처음으로 출토돼 ‘금관총’이라고 부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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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금관총 출토 금관(국보 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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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노서동고분군 금관총
 




경상북도 동남부에 있는 경주시.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찬란했던 신라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있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로, 이후 주변의 여러 나라를 통합해 통일신라를 이룩하고 평화로운 문화 발전과 함께 56명의 왕조를 이어 왔다. 경주의 역사가 곧 신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를 상고시대에는 진한 12국 중 사로국이라 칭했고, 삼국시대에는 서라벌 또는 계림이라고 불렀다. 이후 935년(고려 태조 18년)에 경주로 처음 칭했으며, 동경에서 다시 경주로, 또 계림부로 개칭을 거듭하다 조선시대에 경주부, 경주군에 이어 지금의 경주시가 됐다.


경주에서는 시내 중심부터 주변까지 곳곳에서 규모가 대단한 봉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수많은 신라의 봉분 중에서도 지난해 2~6월까지 재발굴 조사가 진행된 금관총은 광복 70년을 맞아 해방 이후 축적된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사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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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고분군 금관총 재발굴 조사 후 복토한 모습
 





우리 힘으로 재발굴 조사를 진행한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조사 당시 현장을 직접 찾아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지난 2월 초 더 늦기 전에 신라의 역사가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경주를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서울에서 차로 부지런히 달려 5시간 만에 도착한 경주. 칼바람이 부는 날씨였으나 하늘은 맑았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발굴조사팀 역시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금관총 재발굴 조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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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나무덧널 바닥 해체 후 모습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이야말로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의 유물을 볼 수 있는 ‘신라 보물 창고’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미리 약속을 잡아놨던 학예연구관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가는 통로에도 경주 곳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차곡차곡 정리돼 연구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혁종 학예연구관은 “금관총 발굴 조사는 국립박물관이 시행해 온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의 일환”이라며 “금관총이 훼손된 상태에서 금관이 나오게 됐고, 금관이 나오자 일본인들이 급히 무덤 유물 수습을 했다”고 일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금관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의 한 주택을 짓는 과정에서 우연히 최초로 금관이 출토돼 세상을 놀라게 한 무덤이다.

당시 금관총의 발견은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금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장신구·무구(武具)·용기 등이 출토됐으며, 특히 구슬 종류만 총 3만 개가 넘게 나왔다.

현재 금관총은 봉분이 많이 깎여 원래 대형고분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공식적으로 노서리고분군 제128호분이라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더욱 유명한 이유는 신라의 금관이 한국에서 최초로 출토된 점으로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다.

당시 일제는 나흘간 부장품 등 유물만 수습하고 봉분을 덮었다. 발굴 조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금관총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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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이사지왕도 명문 출토 모습
 




특히 지난 2013년에 세 고리 자루 큰 칼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면서 금관총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됐지만, 일제가 작성해 놓은 기록이 미흡해 금관총에 대한 연구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의 원인이 초기 일제의 부실 조사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 국립박물관은 몇 년 전부터 금관총 출토품의 정리를 진행해 왔고, 지난해 3월부터 금관총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를 시작해 6월에 마무리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은 정식 재발굴 조사에 들어가기 전 지하 물리 탐사 등의 체계적인 조사방법을 동원해 금관을 비롯한 부장품 출토 공간을 미리 확인했다. 무덤 구조와 관련한 새로운 정보 수집과 당시 수습하지 못한 부장품도 일부 발견하는 성과를 냈다.

재발굴 조사를 마친 후 출토 유물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일시 동안 일반인에게 공개했으며, 지금은 출토 유물들과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항 등을 연구하고 있다. 곧 있으면 금관총 옆에 있는 서봉총에 대한 발굴조사도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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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돌무지 구조 내부 모습으로, 조사 연구원 두 명이 있는 위치에서 새로운 유물이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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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다시 살펴 본 금관총
일제 기록에 없는 새로운 유물 발견


금관총의 부장품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대부분 수습됐다. 묻힌 이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금귀걸이, 목걸이, 금제허리띠, 금팔찌, 금반지 등을 찼다. 그리고 머리 위쪽의 부장궤 속에는 여러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 많은 보물을 넣었다.

일제가 수습한 출토품은 연구를 위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1923년 경주에 금관등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금관고(金冠庫)’라는 건물을 지으면서 경주로 돌아왔다.

재발굴 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수습하지 못한 것에 주목했다. 나무덧널 주변의 흙을 물 체질한결과 유리그릇, 은제 허리띠 장식, 유리구슬, 금실, 달개 장식이 달린 금실과 같은 다양한 부장품이 나왔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황금에 버금가는 귀중한 재료인 유리 재질의 그릇이다. 비록 작은 조각만 확인됐으나, 코발트색의 유리그릇 편은 당시 일제가 정리한 보고서에는 없는 것으로, 새롭게 확인된 부장품이다. 이와 거의 같은 유리그릇 편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앞으로의 비교 연구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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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한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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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출토 은제 허리띠 장식                                                                       금관총 출토 가는고리 금귀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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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출토 굵은 고리 금귀걸이                                                                   금관총 출토 유리그릇 편
 




은제 허리띠 장식 일부도 발견됐는데, 이 역시 일제강점기 보고서에 없는 새롭게 발견된 유물이다.

무엇보다 재발굴 조사를 통해 주목되는 성과는 일제가 당시 완전히 조사하지 못했던 금관총의 돌무지 구조를 확인한 점이다.

조사단은 돌무지 구조의 평면 형태가 모서리를 없앤 한 변 20m의 네모 형태임을 확인했다.돌무지를 쌓기 전 목조가구(나무를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가로를 연결한 바둑판 모양의 틀)시설을 한 흔적도 발견했다.

물론 목조가구 시설은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조사단 발표 자료에 따르면 목조가구를 짜고 그 안에 돌무지를 축조해 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발 진전된 조사 결과를 도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돌무지의 단면 형태가 50° 정도 경사의 사다리꼴 형태임이 밝혀져 지금까지 돌무지 단면 형태에 대한 학계의 논쟁을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다.

금관총의 구조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평가됐다. 신라 최고위급 지위를 가진 왕과 왕족 그리고 몇몇 귀족들만이 축조할 수 있는 거대 봉분의 ‘지상식’ 돌무지 나무덧널 무덤(적석목곽묘, 積石木槨墓)임이 이번 재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즉 이 무덤은 삼국시대 다른 나라의 무덤과 달리 망자와 부장품을 지하에 묻지 않고, 지상에 나무덧널(木槨)을 축조하고 망자와 부장품을 넣는 장례를 치른 후 나무덧널 위와 사방 주위를 큰 강돌로 두껍게 쌓은 후 흙을 덮은 구조다.

현재까지 거대 봉분을 가진 신라의 ‘지상식’ 돌무지 나무덧널 무덤 중 발굴 확인된 것은 서봉총,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있다.

조사단은 망자와 부장품이 있었던 나무덧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제기했다. 일제 연구자는 덧널이 하나이고(단곽식), 크기는 길이 4.8m, 너비 2.1m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고고학계는 금관총 나무덧널의 수와 크기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했고, 재발굴 조사를 통해 나무덧널 아래 깔렸던 자갈층의 범위가 길이 5.7m, 너비 3.0m 정도임을 확인함에 따라 금관총 나무덧널의 크기가 일제 연구자가 제시한 것보다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덧널의 수도 과거 보고서 내용을 재검토한 후 발굴 성과를 함께 고려해 보면 하나가 아니라 2개 즉 이중곽일 수도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게 조사단의 설명이다.




노서동 금관총 주인은 이사지왕?
또 다시 ‘尒斯智王刀’ 새겨진 명문 출토

지난 2013년에 금관총에서 출토된 큰 칼에서 ‘尒斯智王(이사지왕)’ 등의 명문이 발견된 바 있다. 이번 재발굴 조사는 비록 두 번째 발견에 해당하지만 정식 발굴 과정을 통해 확인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새로이 확인된 부장품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칼집 끝 장식에 새겨진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와 ‘十(십)’이라는 명문이다. 명문은 칼집 끝 장식(금제) 양쪽 면에 각각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와 ‘十(십)’이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尒斯智王刀’는 말 그대로 ‘이사지왕의 칼’이라는 의미이고, ‘十’은 주술적인 의미라고 하는 견해가 많다.

정식 재발굴 조사 최종 단계에서 발견된 명문은 2013년 발견된 명문과 거의 같지만 ‘刀(도)’라는 글자가 추가돼 있는 점이 다르다.

2013년 명문 발견 이후 금관총 주인공과 이사지왕의 관계, 칼 주인과 이사지왕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어쨌든 칼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점은 명확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조사단은 가는고리 금 귀걸이 2점(1쌍), 굵은고리 금 귀걸이 1점, 가는고리 금 귀걸이 1점, 유리구슬 수백 여 점을 비롯해 많은 양의 부장품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들 중 가는고리 귀걸이 2점(1쌍)은 아직까지 신라 고분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는 특이한 형태라 더욱 주목되고 있다.

조사단은 주인공이 묻힌 위치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비록 실제 나무덧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남아있는 구조와 목질 흔적으로 판단해 볼 때 나무덧널은 대형 나무기둥을 세워 동·서 9m, 남·북 8m로 구획한 돌무지 구조 안쪽에 동·서 길이 7.2m, 남·북 길이 6.2m, 깊이 0.4m의 구덩이를 파고 강돌과 자갈을 깐 구조 위에 축조된 것을 확인했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보고서에는 하나의 나무덧널 안에 나무널(목관)이 들어있는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발굴 결과, 금관총의 나무덧널은 폭 2.4m인 내부덧널(내곽)과 폭4.2m인 외부덧널(외곽)의 이중 구조로 축조돼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형 나무기둥을 세워 돌무지 공간과 주인공이 묻힌 공간을 구획한 구조는 현재까지 신라 적석목곽분 조사에서는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앞으로 신라 고분의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것으로 조사단은 내다봤다.

국립박물관은 조사 성과를 토대로 금관총 종합 보고서를 간행할 예정이다. 앞으로 금관총 및 서봉총과 같은 재발굴을 통해 일제강점기 고적 조사를 다시 검토하고, 이를 근거로 신라고분 연구의 새로운 기초 자료를 확보할 계획이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분산돼 보관돼 있다. 특히 순금으로 제작된 금관과 허리띠장식 일괄품은 각각 국보로 지정돼 있는데, 금관은 ‘금관총금관’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87호, 허리띠장식은 ‘금관총과대 및 요패’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88호로 각각 지정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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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지왕도 명문 새겨진 칼집 끝 금제 장식 부분을 확대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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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전시실에 전시된 금관총 출토 금관(국보 87호)과 금제 허리띠(국보 88호) 등 장식 유물
 



일제가 체계적으로 조사하지 못했던 금관총.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 인력으로 정식 발굴 조사를 시행해 더욱 의미 있고, 일제가 작성한 기록에 없는 새로운 유물이 나와 더욱 값진 시간이었다.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일 것이라는 추측이 강력하지만 앞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과제다.

한편 사적 제512호 노서동 고분군은 월성을 중심으로 북쪽 일대에 분포하는 많은 신라 고분 중 서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노서동 고분군에는 노동동의 봉황대 고분과 더불어 그 규모에서 쌍벽을 이루는 서봉황대 고분을 비롯해 1921년에 우연히 금관이 출토돼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 1926년에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브 아돌프 6세가 발굴 조사에 참여했던 서봉총, 194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발견돼 신라 고분에 대한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총과 함께 쌍상총, 마총 등이 남아 있다.

발굴 조사된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지만, 쌍상총과 마총 같은 돌방무덤도 있다. 1984년에 신라 고분 정비 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민가를 철거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