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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웃는 섬, 완도
해상왕 장보고, 好時節을 그리다
한반도 최남단 수호하는 靈山, 주작산


이 책을 받아볼 때쯤이면 ‘붉은 원숭이의 해’가 새롭게 떠올랐을 터다. 슬기롭고 영민하며,
지혜롭고 다재다능한 솜씨를 지닌 원숭이처럼 2016년 새해가 모든 이에게 기대 이상의 선물이 되길
바라며 2015년 마지막 답사의 이야기를 이곳에 담는다.


글 백은영 사진 김미라




지난해 12월 3일 새벽 4시. 가로등 불빛에 너울거리는 눈이 더욱 시리게 느껴지는 시간. 답사팀은 전남 완도로 향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배를 채우고 다시 긴 시간을 달려 완도에 도착했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섬 완도(莞島). 빙그레 웃을 완(莞)에 섬 도(島)자를 써 ‘빙그레 웃는 섬’이라는 뜻을 가진 섬. 조용하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 곳. 산 위에서 바다를 조망하고, 바다에서 산을 바라볼 수 있어 그 운치를 더하는 곳. 세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기에 절로 ‘빙그레’ 웃음 지어지니 과연 빙그레 웃는 섬이라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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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전경
 




해양 영웅의 이야기가 깃든 곳, 완도

전라남도 서남해안 265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완도군. 55개의 유인도와 210개의 무인도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엔 바다를 호령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두 영웅의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함 12척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유례없는 해양 영웅으로 꼽히는 해상왕 장보고와 충무공 이순신이 남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다. 각각 해양 진출과 해양수호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 두 영웅의 연결고리가 바로 이곳 완도다.

장보고의 주 무대였던 청해(완도) 앞바다와 정유재란 당시 마지막 수군 본영이었던 전남 완도 고금도. “신에게는 아직도 전함 12척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명량대첩도 진도 벽파진과 노량해협 울둘목, 해남 우수영 앞바다가 무대였다. 그렇다. 완도는 오랜 역사와 시간을 관통해 현재의 우리에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간직한 섬이다.

장보고가 서남해안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제해상무역을 주름잡았다면,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에서 해양 침략세력인 일본군과 해전을 벌여 연전연승의 신화를 일군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완도에 장보고와 이순신을 기리는 관련 시설과 유적지가 많은 연유다.

완도군 청해진서로(완도읍 대신리)에 위치한 청해포구촬영장은 드라마, 영화, CF촬영의 명소로 꼽힌다. 2004년 11월부터 이듬해인 2005년 5월까지 KBS 특별기획 드라마로 방영된 <해신>을 시작으로 <대조영> <주몽> <이산> <대왕세종> <정도전>과 같은 대하드라마는 물론, 2014년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영화 <명량>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 청해포구촬영장에서 진행됐다. 특히 장보고의 일생을 다룬 <해신>의 경우, 장보고가 태어난 완도에서 촬영돼 그 의미를 더한다.

장보고, 우주를 품다

1200년 전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장보고(張保臯, ?~841)는 완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당(唐)나라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에서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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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포구촬영장 청해포구촬영장 뒤로 보이는 완도 상황봉. 해발 644m의 상황봉은 완도섬 중앙에 위치해 있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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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아래인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갈 수밖에 없던 데에는 당시 신라의 엄격했던 골품제가 자리하고 있다. 신분이 낮았던 장보고로서는 신분상승의 한계를 느꼈을 터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당으로 건너간 장보고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30세 되던 해인 819년 무령군(武寧軍)에서 병사 1000여 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軍中小將)의 직위에 오른다.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는 삶이었지만 장보고는 돌연 신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엄격한 신분제도 속에 갇혀 인간의 존엄성마저 저울질당해야 했던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차별마저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삶. 청년 장보고는 백성을 지켜줘야 할 조국이 외려 자신을 버린 야속한 존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격한 신분제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계속돼 성(姓)조차도 왕족이나 신라 6촌(村)에서 비롯된 여섯 성씨를 비롯한 일부 세족(勢族)만이 쓸 수 있었다.

장보고 역시 골품제의 차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남해 바닷가의 천민 출신인 그에겐 그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활보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간 뒤 성의 필요성을 느낀 그가 궁(弓)자를 변을 삼아 장(張)이라 하고, 복(福)에서 글자의 음절 순서에 따라 보고(保皐)라는 두 글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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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벽화 ‘해상왕 장보고’ 1200년 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북아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형상화한 것으로
바다를 무대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도전정신과 웅혼한 기상을 전하고 있다. (제작 육광정(陸光正) 중국 목공예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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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보고 기념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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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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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진 돌의 모습이 마치 김삿갓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성(姓)마저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장보고는 당시 기회의 땅으로 불리던 당나라로 건너가 사나이로서의 포부를 펼쳤다. 그러던 중 조국 신라인들이 중국 해적에 의해 노예로 붙잡혀와 고통 받는 참상을 목격하게 되고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비분강개(悲憤慷慨). 그가 느꼈을 마음 속 끓어오르는 분노는 피를 나눈 한 형제가 애매한 고통과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을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의(道義)에 근거를 두고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마음’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정기(精氣)’ ‘공명정대(公明正大)하여 조금도 부끄럼 없는 용기(勇氣)’를 뜻하는 말 호연지기(浩然之氣). 자신의 출세와 부귀보다 조국 신라와 민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장보고가 품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생각이 그를 바다의 왕 ‘장보고’로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조국 신라는 장보고 이전의 ‘활보’를 잊었을지 모르나, 활보 장보고는 단 한 번도 제가 떠나온 나라를, 그리고 민족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장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받은 벼슬을 버리고, 조국 통일신라로 돌아간다. 그는 해적 소탕을 위해 청해(淸海, 완도)에 군영(軍營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한다.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의 일이다. 왕은 쾌히 승낙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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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타워 뒷편에 있는 봉화대. 이곳에 서면 완도항과 명사십리로 이어지는 다리가 보인다
 




군사 1만으로 청해에 진영을 설치한 장보고는 해적 토벌에 주력, 해상권을 장악한 후에는 청해진을 경유하는 당이나 일본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하는 한편 당·일본과 무역을 전개해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게 된다. 조국 동포들을 해적으로부터 지켜 보호함과 동시에 장보고 자신도 해상자본가로 성장,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게 되는 발판을 닦는다. 문성왕때는 청해장군으로 임명된다.

장보고는 약탈과 인신매매가 판치던 청해 앞바다를 그 이름처럼 맑고 깨끗한 바다로 만들었다. 공포와 불법이 도사리고 있던 바다, 그 위를 다니며 사람들을 괴롭게 하던 배들이 무역품을 실어 나르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이슬람과도 교역하는 통로가 됐다.

마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는 기독교 경서 <성경> 이사야에 기록된 내용처럼 장보고가 바다를 지배하는 동안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잔잔한 바다, 평온한 백성. 그러나 정작 신라 귀족들의 심기는 불편했으니,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꿈꾼 장보고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결국 장보고는 심복이던 염장의 계략에 넘어가 암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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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 대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으며, 일본 천태종의 엔닌스님은 828~847년 당나라 불교 성지를 돌아보고 기록한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총 4권)> 2권과 4권을 통해 당시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엔닌스님은 구법활동 중 은덕을 베푼 장보고 대사를 신격화하고 귀국 후 교토에 적산선원을 세워 장보고로 추정되는 재신 적산신을 모시게 했다. 당나라 문인 두목(杜牧, 803~852)이 지은 <번천문집>에서는 장보고와 그의 친구였던 정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작지만 큰 섬 장도

“이곳이 청해다. 비록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하지만 곧 우리 손에 의해 완벽한 해상의 요새로 바뀌게 될 것이다. 청해진은 도처에 창궐하는 해적들을 없애는 전초기지가 될 것이며 또한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장보고의 눈엔 이 작은 섬 완도는 그야말로 완벽한 해상 요새였다. 완도 청해진유적지(장도, 사적 308호)는 지금의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809외로 총 면적 125,000㎡(3만8000평)의 작은 섬이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총 3차례의 발굴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발굴 조사된 수많은 유구와 유물들은 장보고의 해상활동 근거지로서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자료이자 통일신라시대 ‘표지유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장도의 별칭은 ‘장군섬’이다. 마을에서 약 180m쯤 떨어져 있으며 하루 두 차례씩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간조 시에만 장도에 들어갈 수 있는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2009년에 나무다리를 놓아 출입을 자유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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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무역선 모형
 




총 길이 890m의 청해진 성벽은 고대 판축기법으로 축성됐으며, 총 연장 331m로 섬 입구에서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 설치된 소나무 원목렬은 방어용 목책(木柵)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과 목책 시료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 9세기 중반으로 확인됐으니,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어른 키보다 컸던 통나무 목책들이 1200년 세월 동안 바람에 부대끼고, 바닷물에 쓸리며 이제는 겨우 밑동만 덩그마니 남아 왠지 모를 쓸쓸함을 더한다. 해안을 따라 걸으며 그 오랜 시간을 버텨온 목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1200년 역사의 흔적이 나무 틈 사이사이로 올올이 박혀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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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책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갯벌이 깎이면서 발견돼 현재 일부가 드러났다. 목책의 수종은 대부분 소나무로 폭 80㎝, 깊이 90㎝ 규모로 동서방향으로 긴 도랑을 만든 후 1열로 통나무를 촘촘히 세워 조성했다. 방어용 혹은 접안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탄소연대 측정 결과 장보고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침 답사팀 중 일행이 장보고기념관에서 봤던 목책과 조금은 다른 형태를 지닌 목책을 우연히 발견, 그 자리에 표시를 해두고 기념관 측에 전달해 놓은 상태다. 목책 중 하나일 것이라 추측은 하지만 흥분과 함께 뿌듯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해안을 따라 다시 입구로 돌아와 외성문을 지나 고대(高臺)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대는 동서로 이어지는 청해진성 남쪽 성벽의 중간 지점으로 내부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흙다짐을 해 축조됐다.

사실 이곳에 오르기 전까지는 왜 하필이면 이 작은 섬에 진을 설치했는지 의아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알지 못한다고 했던가. 이곳에 오르니 그런 궁금증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배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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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청해진 유적지(사적 3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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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작은 섬이지만, 장보고는 이곳 장도에서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아가는 원대한 꿈을 이뤘다. ‘바다를 평정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1200년 전, 장보고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봉황의 두 날개, 바다를 감싸다

완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답사팀은 강진만을 조망하기 위해 덕룡산(德龍山, 429.9m)에서 출발해 주작산(朱雀山, 475m)으로 내려오는 연계산행을 하기로 했다.

강진 도암면 소석문에서 시작한 덕룡산 서쪽으로 주작산과 두륜산이 이어진다. 덕룡산은 주봉인 동봉과 서봉 사이의 암릉지대가 압권이다. 마치 공룡능선의 축소판 같이 우뚝우뚝 뾰족이 솟은 바위군이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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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산(朱雀山, 475m). 봉황이 두 날개를 펼친 듯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마치 신령한 기운을 내뿜는 듯한 주작산은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와 더불어 사현신으로 불리며 남쪽의 최전방을 지켜준다고 알려져 있다.
 




계절은 겨울이건만, 산에는 아직 알록달록 제 옷을 채 벗지 않은 꽃과 나무가 더러 눈에띈다. 땅의 따뜻한 기운을 받은 것인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기기 위한 것인가. 배섭고 차가운 바람에도 땅속 깊이 뿌리 내린 꽃과 나무가 답사 일행을 반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산은 쉽게 제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그래서인가. 답사팀이 산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일기(日氣)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회색빛 구름이 낀 흐린 날씨라 각오는 했건만 갑자기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는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 정도다. 군락을 이룬 억새도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에 제 몸을 이리저리 누인다. 바람에 출렁거리는 억새의 물결이 비바람과 어우러져 묘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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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산 너머 보이는 강진만
 




비바람을 뒤로 하고 오르다보니 어느새 바람이 잦아든다. 허나 이도 잠시, 이내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삽시간에 변화하는 날씨를 보며 새삼 자연의 오묘함을 느낀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인가. 대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그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변화무쌍한 일기의 변화 앞에, 조물주가 만든 기기묘묘한 산과 바위의 형세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산을 정복한다고 말하지만, 산을 오르며 느낀 나름의 생각은 산 앞에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사로잡은 잡다한 생각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산은 제 품에 나를 안는다.


주작산 공룡능선이 보인다. 주작산은 남주작산(南朱雀, 428m)과 더불어 산세가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듯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곳곳에 긴 바위능선이 많고 정상에 서면 다도해 완도의 상황봉, 해남의 두륜산을 바로 곁에 두고 있어 조망이 일품이다.

상서로운 새의 상징인 봉황은 풍수지리학상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와 더불어 사현신으로 남쪽의 최전방을 지켜주는 신장(神將)으로 통한다. 따라서 주작산은 한반도의 최남단을 떠받치는 영산(靈山)이라 할 수 있다.

신비한 기운을 담은 산. 그 만고의 시간 동안 혹독한 계절을 이겨낸 우리의 산하(山河). 우리 민족이 반만 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신의 섭리를 담고, 신의 뜻대로 우리를 지켜온 아름다운 강산이 함께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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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산 기묘한 바위
산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아닌가 한다. 그야말로 조물주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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