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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일어날 밝은 곳’ 거창 居昌

덕유산 품에 안겨 ‘피안의 세계’ 고대


글 박선혜 사진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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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 거창군이 지역명을 홍보하고자 내건 ‘거창한(韓) 거창’에 걸맞게 높은 산과 맑은 물 등 빼어난 산수풍광을 자랑한다. 들른 곳마다 오묘하고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곳, 그래서 “거창한 곳 맞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던 곳.

자연, 역사, 민속,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어디 하나 빼어나지 않은 곳 없는 거창에서 만물의 이치를 곱씹으며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 본다.



거창은 가야산·덕유산·지리산 3대 국립공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지리상으로는 소백산맥의 준령을 경계로 경상북도·전라도와 접경하고 있다. 예부터 ‘크게 일어날 밝은 곳’ ‘매우 넓은 들’ ‘넓은 벌판’이란 뜻에서 거열(居烈), 거타(居陀), 아림(娥林)으로 불렸고,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거창(居昌)으로 처음 불린 후 주변 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불리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고순시국’ 또는 ‘거타(居陀)’로 불렸는데, 고순시국은 삼한시대 변한의 12개 소국 중 하나였다. 이후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며 부속 현(縣)의 편입과 군, 읍 등으로의 개칭, 승격을 거쳐 현재에는 거창읍(1읍), 주상·웅양·고제·북상·위천·마리·남상·남하·신원·가조·가북면(11면)의 행정 구역으로 구성돼 있다.

가을 단풍이 절정이었던 지난 11월 초, 경상남도 거창으로 향하던 답사팀은 차창 너머로 ‘알록달록’ ‘울긋불긋’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묘사가 부족할 만큼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물든 수목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때마침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덕유산이 품은 거창을 곧 만날 생각에 가슴은 절로 설레었다.

‘수승대’와 마주하니 悠悠自適 따로 없네
퇴계 이황·요수 신권, 편지로 경치 칭송


옛 선인의 말에 知者樂水(지자요수) 仁者樂山(인자요산)이라 했다.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 한다’라는 말이다. 그랬을 때 슬기로운 사람, 어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념과도 같은 것이 있어서였을까. 거창의 명승지 수승대를 마주하자 선비들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헤아려 진다.

많은 사람이 덕유산의 맑은 계곡이라 하면 ‘무주구천동’ 즉 무주군의 구천동 계곡을 떠올린다. 하지만 거창·함양 사람들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용추계곡의 심진동(尋眞洞)과 거창의 원학동(猿鶴洞) 계곡을 그에 버금가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조선의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이다. 안의삼동은 ‘안의현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골짜기 셋’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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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곳으로 손꼽는 명승 제53호 수승대는 안의 삼동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에 있다. 수승대 내에는 화강암 암반이 대부분인데 맑은 물은 물론이고, 관수루(유형문화재 제422호), 요수정(유형문화재 제423호) 등 고즈넉한 정자가 함께 어우러져 신선이 내려와 머물다 갔다고 해도 믿겨질 법한 경치를 자아낸다.

수승대에는 명칭과 관련해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요수정을 지은 요수신권(愼權, 1501~1573)의 화답시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삼국시대에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다. 그래서 이곳을 거처 사신을 보냈는데, ‘근심스런 마음으로 사신을 떠나보낸 곳’이라는 뜻에서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이후 조선시대 때 인근 마을을 방문한 퇴계 이황이 요수정의 주인인 신권에게 아름다운 경관과 어울리는 이름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며 ‘수승대(搜勝臺)’라 이름하는 개명시를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수승대로 불리고 있다.

搜勝名新換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遠林花欲動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陰壑雪猶埋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未寓搜尋眼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惟增想像懷 가슴 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他年一樽酒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巨筆寫雲崖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퇴계 이황

이황의 개명시를 받은 신권은 화답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林壑皆增采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 가는데
臺名肇錫佳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勝日樽前値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深荷珍重敎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殊絶恨望懷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行塵遙莫追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獨倚老松崖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요수 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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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는 거북바위가 유명하다. 거북바위 주변에는 송림(松林)이 우거져있어 더욱 장관이다. 이 소나무는 거북바위 위에도 듬성듬성 자리 잡았는데 주변과 잘어울려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거북바위는 맑은 물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거북이 형상과 닮아 이름 붙여졌다. 이름과 관련해 전해 오는 설도 있다.

장마가 심했던 어느 해, 불어난 물을 따라 윗마을 북상의 거북이가 떠내려 왔다. 이곳을 지키던 거북이가 그냥 둘 리 없어 싸움이 붙었는데 이겼고, 그 거북이 이곳을 평생 지키며 죽어 바위로 변했으니 거북바위가 바로 그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전설 속에는 바위가 된 거북이가 오늘도 수승대 지킴이 구실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거북바위에는 시인묵객 풍류가들이 새긴 크기도 제각각인 많은 한문시가 남아 있다. 누군가의 성명 석자도 빈틈없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분명 이곳을 찾아 시를 읊조리거나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이었을터. 여기에는 거창이 자랑하는 선비 갈천 임훈(林薰, 1500~1584)의 시도 새겨져 있다.

花滿江皐酒滿樽
강 언덕에 가득한 꽃 술동이에 가득한 술
遊人連袂謾紛紛
소맷자락 이어질 듯 흥에 취한 사람들
春將暮處君將去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不獨愁春愁送君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임훈은 지나는 봄이 아쉬워 수승대를 바라보며 이와 같은 시를 읊었으리라. 답사팀도 그야말로 유유자적이 따로 없는 수승대를 뒤로 하자니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지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심신을 쉬어 가고자 함은 마찬가지인가보다.

언젠가는 봄에 다시 한 번 찾아봐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달암이 사위 유환과 망국의 한 달랬던 ‘문바위’
옛 가섭사 일주문 역할 해 ‘가섭암’으로도 불러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고려적 요소 풍겨


금빛원숭이의 전설이 있고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원산자연휴양림. 답사팀이 경내에서 찾아가 보고자했던 목적지는 전국에서 단일암으로는 가장 큰바위인 ‘문바위’와 보물 제530호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이다.

금원산 자락에 난 잘 닦인 차로를 따라 이동하다보면 문바위가 있는 방향을 알려주는 푯말이 나온다. 그길을 따라 가면 차로도 건널 수 있는 얕은 계곡물을 만나는데, 이 물길을 건너 비포장 길을 오르면 문바위를 만날 수 있다. 트럭이나 공사 등의 작업용 차가 아닌 이상 일반차를 이용해서는 물길부터 비포장 오르막길까지 어림잡아 약 500m까지만 이동할 수 있다. 한쪽에 주차하고 걷다가 얕은 물길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규모가 남다른 바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바로 문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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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삼존입상이 있는 굴로 들어가는 입구
 





이렇게 큰 바위가 어떻게 이곳에 자리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바위 앞에 있는 작은 안내판에는 ‘전국에서 단일암으로는 가장 큰 바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바위는 옛 가섭사라는 절의 일주문에 해당했다고 한다. 즉 문바위의 ‘문’은 입구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서는 가장 첫 번째 문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一心)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일주문에 담겨있다.

바위를 사찰 일주문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거창바위와 불교문화의 연계가 깊다는 것을 한편으로 보여준다. 거창에서 족히 3m가 넘는 석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연관성이 있을 법하다.

문바위는 옛 가섭사의 입구를 지키는 바위여서 ‘가섭암(迦葉岩)’으로도 불렸으나, 수 천 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름도 수없이 바뀌었다. 호신암, 금달암, 두문암, 지우암, 기은암, 용의 여의주 등이 주변 여건에 따라 그때그때 불린 문바위의 다양한 이름이다. 바위에는 ‘달암 이선생 순절동’이라고 적혀 있다.

고려 말 판서 달암 이원달 선생과 그 사위 유환 선생이 고려가 조선에 망하자 두 나라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이곳에 숨어들어 여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의 지조가 문바위에 담겨 있다.

문바위를 지나 비교적 잘 닦인 길을 따라 가면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있는 돌계단이 나온다. 이 돌계단 역시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입구는 문바위요, 과거에는 이 문바위를 통해 바위굴로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괜히 바위 이름에 ‘문(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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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돌계단을 오르니 거대한 바위 두 덩이 사이로 폭이 좁은 돌계단이 또 있다. 경서 성경 어느 구절에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하지 않았는가. 참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는 그만큼 고통이 따르고, 그 과정이 없이는 어떠한 깨달음도,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이치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본다.

마애여래삼존입상은 가섭암지에 있다. ‘가섭’은 아난 존자와 더불어 석가의 열 명의 제자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제자였다. 마하가섭이라고도 불리며, 석가가 죽은 뒤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 역할을 해내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칭했다.

바위굴 안쪽 마애여래삼존입상은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얕게 새겼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넙적하며 얼굴에 비해 작은 눈·코·입, 밋밋하고 긴 귀 등에서 둔중하고 토속적인 인상을 풍긴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었지만,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하고 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臺座)와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뻗친 옷자락은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형식화되고 도식적인 요소도 보인다. 결국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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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계곡 사선대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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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폭포
 




신선이 바둑뒀다던 월성계곡 ‘사선대’
진리 삼매경에 빠지는 심진동 ‘용추폭포’

‘‘달빛 곱고 별빛 고운 마을’이라는 뜻의 월성마을을 지나는 물길이 계곡을 이뤄 거창의 소금강으로도 불리는 월성계곡. 월성천을 따라 형성된 길이 5.5㎞의 계곡으로, 바위와 벼랑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답사팀이 찾은 곳은 계곡 상류의 ‘사선대’다.

사선대는 동춘당 송준길이 이곳에 은거해 송기 또는 송대라고도 불렸다. 1909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강(堈)이 전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북상, 위천 지방의 우국청년들과 만나 이곳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던 곳이라 하여 왕실의 선원(璿源)을 뜻한 이름으로 ‘사선대(四仙臺)’라고 부르고 있다.

사선대 맨 아래층 바위에는 경상감사 김양순이 쓴 ‘사선대’라는 전서가 새겨져 있다. 맨 꼭대기에 얹혀진 바위는 봉황 모양으로 남덕유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선대 아래는 사선담이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비경을 뽐낸다.

안의삼동 중 또 다른 하나가 거창 옆에 있는 함양 ‘용추계곡’이다. 용추계곡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 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尋眞洞)'이라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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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산 의상봉
 




차로를 따라 ‘용추사’라 새긴 돌판 앞에 다다랐다. 시원한 폭포 소리가 답사팀의 발길을 재촉한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바로 ‘용추폭포’다.

용추계곡의 깊은 물이 화강암을 타고 용호로 시원스럽게 떨어지니 무더운 여름 이곳을 찾으면 금방 더위가 가실 것 같다. “콸콸콸”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사방으로 물방울을 튕기고, 답사팀은 용추폭포의 위엄에 매료됐다.

용추사로 올라가니 계곡으로 이어진 길이 따로 있다.

길을 따라 가니 폭포를 이룬 물줄기가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수정처럼 맑은 물이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전에는 평온 그 자체였다.

의상대사가 참선한 ‘의상봉’과 마주하다

거창군 가조면의 너른 땅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우두산 의상봉. 답사팀은 의상봉(1032m) 정상에 오르기 위해 바리봉과 장군봉을 거쳐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코스를 밟았다. 하늘도 이른 아침부터 맑은 날을 허락해주니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의상봉을 품은 우두산(1046m)은 산의 형세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의 ‘산중문답’에 나온 구절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서 이름을 따 ‘별유산’이라고도 불렸다.

산세의 수려하기가 덕유산, 기백산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많다. 그 중에서 의상봉과 처녀봉, 장군봉(956m), 바리봉, 비계산 등이 빼어난 산세를 자랑한다. 특히 의상봉은 우두산 전체의 이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의상봉은 우두산의 주봉은 아니지만, 주봉으로 삼아도 될 만큼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비경이 뛰어나 많은 사람이 우두산하면 의상봉을 꼽는다.

의상봉이란 이름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과거세와 현세에서 참선한 곳이라는 뜻에서 의상대사 이름을 따와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소의 형세를 닮은 산이어서인지 우두산에는 뾰족하게 솟은 돌부리가 유독 많다. 사실은 길조이고, 높은 곳에 주로 서식한다는 까마귀 떼를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답사팀뿐이었고, 까마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얼마나 오래 인적이 찾지 않았던 것일까. 오죽 반가웠으면 산행 내내 답사팀 주변을 맴돌았을까.

뾰족뾰족 솟은 돌부리들을 넘기가 만만치 않다. 길을 알려주는 위치표식 끈도 매단 지 오래돼 보였지만 몇 걸음 떼면 쉽게 눈에 띈다. 미리 산을 오른 자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수많은 돌부리에 어찌 길을 알 수 있었을까 싶다.

매번 산을 오르면 줄곧 드는 생각이 있다. ‘산은 거짓말을 안 한다’ ‘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산 초입에서 드는 설렘도 잠시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다시 평평한 능선을 걷고, 바위를 넘으며 숨이 차오르기도 하는 과정을 인내하고 나서야 비로소 산이 주는 기쁨을 맞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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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면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돌이 눈길을 끈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리고
있는 듯한 모습 같기도 하다.
 






힘들게 오른 비로봉 정상에 누군가 돌을 세워 놓았다. ‘인내하고 인내하는 것이 나의 힘이다’라는 글과 함께. 인내를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이 무척이나 공감됐다.

문득, 산을 오른다는 것은 내면을 들추고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르기 전 나의 모습은 어떠했고, 산을 오르고 있는 나는 어떠하며, 산을 정복한 나는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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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리 석조여래입상
 





가을 해는 금방 모습을 감춘다. 답사팀은 의상봉을 목전에 두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금방이라도 해가 질 것만 같았다. 비록 의상봉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거짓말 보태 조금만 팔 벌리면 손이 닿을 곳에 올라 의상봉을 마주했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거창에서만 볼 수 있는 키 큰 보물들

거창에는 유독 키가 큰 석불이 많다. 금원산자연휴양림에서 만났던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을 비롯해 양평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377호), 상림리 석조보살입상(보물 제378호), 농산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436호) 등이 대표적이다.

머리 위에 천개(天蓋)를 쓴 것이 눈길을 끄는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 4m에 이르는 거대한 석가여래석불이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통일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목의 삼도와 함께 몸의 굴곡이 잘 드러나 있고, 둥근 얼굴에 반쯤 뜬 두 눈과 입가의 미소가 부처의 자비를 보여주고 있어 소원을 빌면 다 들어줄 것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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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리 석조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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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리 석조여래입상
 




상림리 석조보살입상은 오른손에 정병을,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입상이다. 높이 3.5m이며, 각진 어깨와 일자로 꾹 다문 입술은 관세음보살의 자비보다 오히려 근엄함으로 보인다. 이 석불은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방화된 불교와 불상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가섭암지 석불처럼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로 조각한 농산리 석조여래입상은 낮은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 270㎝로, 신체의 각 부분이 조화로운 비례감을 풍긴다. 생동감이 담긴 조형성 그리고 전형적인 우드야나식 옷주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온화한 미소와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은 사실적으로 조각돼 입체감을 돋보이게 한다.

이번 답사는 모든 면에서 거창만의 문화와 향기를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거창은 거창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일구며 유구한 역사를 이루고 언젠가 다가올 ‘피안의 세계’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