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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만물이 주는 최대의 선물은

깨달음이라


글 이경숙 사진 김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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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0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팔영산. 팔영산 봉우리와 함께 저 멀리 다도해 풍경이 펼쳐져 있다.
 




비경(祕境)을 맛보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탄성을 자아낼 만한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섣불리 감탄하기보다는 문득 이런 고민에 빠진다. 우리를 흠뻑 적시는 감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기암절벽과 어우러지며 오색빛깔이 화려하게 물든 산일런가. 어두움을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이 금빛 찬란한 수를 놓은 듯한 바닷물결일런가. 이번 탐방은 ‘탐방의 의미와 그 감동’에 대해 곱씹어 보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전남 고흥(高興)… ‘높을 고(高)’에 ‘일 흥(興)’. ‘최고의 흥, 최고의 즐거움’을 뜻할까. 고흥군은 ‘High 고흥, Happy 고흥’이란 군정구호를 내걸고 있다. 고흥의 숱한 역사의 흔적과 그 세월을 함께한 빼어난 산수(山水)는 고흥을 찾는 이들에게 참으로 많은 깨달음과 이야기를 선사한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흥이 절로 날 수밖에… 참으로 고흥은 ‘고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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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산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 풍경
 




전라남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고흥군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지형으로, 전체 형상은 북부 남양면의 지협을 정점으로 동-서간의 폭이 좁아지다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반도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마치 오리발과 같은 모양을 이룬다. 소백산맥의 한 지맥이 벌교(筏橋)부근에서 계속 남하해 침강함으로써 형성된 고흥반도는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불과 3㎞밖에 되지 않는 좁고 낮은 지협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다. 동쪽에는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반도와 서쪽으로는 보성만을 사이에 두고 보성군·장흥군·완도군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에 직면해 있다. 고흥은 유인도와 무인도 등 150여 개에 이르는 수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다. 고흥의 기후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함께 받아 비교적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습해 곡물·쌀·보리·밀 등 주곡을 생산하기에 알맞으며, 겨울은 비교적 온난해 시설 원예 등의 농업을 하기에 적합하다.
산지는 저산성 구릉지형으로 팔영산(八靈山)이 608m로 가장 높고, 천등산 550m, 비봉산 447.6m, 마복산 538.5m 등으로 대부분의 산이 600m를 넘지 않는다.





지난 2011년 1월 10일 고흥 점안면에 위치한 팔영산지구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편입·승격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곳 고흥 땅에 닿았다. 고흥이 품고 있는 다도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출발 전부터 설레게 만든다.

늦은 오후 서울을 출발해 꼬박 6시간 이상을 달려 고흥에 도착한 일행은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 날 일정을 점검했다. 오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린 터라 고흥의 첫인상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옥빛 푸른 바다 위 어린 사슴을 닮은 섬 ‘소록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모양새가 어린 사슴을 꼭 닮았다. 그래서 붙여진 섬의 이름은 ‘소록도(小鹿島)’. 2009년 3월 2일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완전히 개통되면서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기 시작했으며, 소록도 주민들도 내륙과의 왕래가 수월해졌다. 현재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 병원 직원과 자원봉사자 등 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의 거리는 약 500m로 소록대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옥빛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배를 타고 왕래했다.

아름답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섬. 많은 이들이 소록도는 알고 있지만 과연 그곳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소록도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중앙공원’이 있다. 잘 정리되고 가꿔진 조경들과 곳곳에 세워진 공덕비 등 여러 모양의 조형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공원이 형성됐다. 푸르른 잔디 위와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은 그저 평온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만 감상하는 것으로 끝나선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자칫 소록도에 얽힌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수박 겉핥기’식 관광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소록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한센병자료관을 둘러보길 권한다. 그리고는 발길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검시실과 감금실로 옮겨 보면 어떨까 한다. 소록도는 과거 많은 한센인들의 피와 땀방울이 뿌려져 있는 곳으로,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피로 얼룩져 있는 아픈 역사의한 페이지를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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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실(등록문화재 제67호)의 쇠창살 창문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과 강탈 행위는 한반도 그 어떤 곳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배 초기 조선에는 광주·부산·대구 등 세 곳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요양원이 있었으나 수용 규모가 너무 적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은 치료 받을 기회조차 없이 여기저기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국가 위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환자들을 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계획을 세우고 1916년 2월 24일 소록도를 선정해 ‘소록도자혜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는 전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끌어다 소록도로 몰아넣었다. 소록도자혜의원은 초기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건립됐으나, 일제 당시 그 안에서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권유린과 학대·감금·강제노역 등 온갖 탄압이 가해졌다. 중앙공원 역시 한센병 환자들을 동원한 강제노역에 의해 공사가 이뤄졌다.


공원 입구쪽에는 검시실과 감금실이 있다. 검시실은 사망한 한센병 환자를 검시하는 해부실로 사용됐다. 현재 건물 안 내부에는 당시 검시대로 사용했던 차가운 흰 돌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벽쪽으로는 수납장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사망한 모든 환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곳에 꼼짝없이 눕힌 채 해부당해야 했다. 그리고는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됐다. 이러한 일로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한센병을 얻은 것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해부당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처절했던 상황을 표현한 일화가 가슴을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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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중앙공원과 공원 안 구라탑(救癩塔) 천사장 미카엘이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탑 아래쪽에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감금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 규정에 의해 설치됐으며,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 되었다. 육중한 담과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감금실에 들어서니, 싸늘한 바람이 몸을 뚫고 지나간다. 이 차갑디 차가운 감금실… 보살핌과 치료가 절실했던 환자들이 이곳에 감금돼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목이 메이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일본인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감식·금식·체벌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부당한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제의 조치로 이곳에서 많은 환자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가 됐으며, 출감 시에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두 정관절제를 당했다.

형무소 같은 감금실 안으로 작은 철장 창문이 보인다. 철장 사이로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자유의 문이었으리라. 숨통 같은 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족을 그리워하고, 자유를 갈망하고, 치유를 희망했을 것이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동산
고향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필-리리

-한하운 시인(한센인)-


거금대교와 금산해안경관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는 소록대교가, 소록도에서 거금도까지는 거금대교(2028m)가 그 사이를 잇고 있다. 거금대교 개통 전에는 녹동항에서 거금도까지 배로 30분이 걸렸으나 대교 건설 후 차로 약 5분이면 거금도에 도착한다. 거금대교를 달려 거금도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다도해 풍경이 눈안으로 달려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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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도에서 바라본 거금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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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해안경관 몽돌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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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조형물 거금휴게소
 





거금대교 역시 고흥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다. 우리나라 해상교량 중 거금대교가 최초로 1층과 2층으로 나뉜 복층 교량으로 건설됐다. 1층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했으며, 2층은 차들이 바다 위를 횡단한다. 거금대교를 건너면 바로 거금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자전거도 대여할 수 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직접 자전거를 타고 거금대교를 내달리며, 탁 트인 바다의 정취를 실컷 맛보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잠시나마 대교를 거닐며 바다 풍경을 감상한다.

거금도에 들어서면 사람 형상의 조형물이 눈에 띈다. 오른팔은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고 손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하다. 안내 표지판에는 ‘고요히 잠들어 있던 고흥을 마침내 깨어난 거인으로 표현했다’고 기록됐다. 거인의 손이 하늘 너머 우주의 별에 닿는 형상이란다. 조형물에서 거인의 손에 있는 것은 두원운석을 형상화한 것이다. 두원운석은 1943년 고흥군 두원면에 떨어진 것으로 낙하지점이 확인된 국내 유일한 운석으로 유명하다.

금산해안경관은 해안가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감상할 수 있다. 남해의 수많은 섬들은 마치 군주를 호위하는 무사들처럼 거금도를 겹겹이 감싸고 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몽돌 해안가로 내려갔다. 동글동글하고 맨질맨질한 크고 작은 몽돌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쩜 이렇게 예쁘고, 갖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몽돌은 오랜 세월 수많은 침식작용을 겪으며, 모났던 부분들이 이렇게 갈고 닦였을 것이다. 인내로써 아픔을 이겨내고 변화가 되니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욕심나는 돌이 됐다. 사람도 그러하겠지. 그런 사람은 누구나 가까이 함께하고 싶을 것이
다.

중국에까지 그 위세를 떨쳤다는 ‘팔영산’

고흥군 점안면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608m의 팔영산(八靈山). 1998년 7월 30일 전라남도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던 팔영산은 지난 2011년 1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지구로 승격됐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그 모양새가 독특하고 신비로워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는 산 이름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다.

옛날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던 중 대야에 비친 여덟봉우리를 보고 감탄하게 된다. 즉시 신하들에게 여덟봉우리의 실체를 찾게 하였으나 중국에서는 도저히 찾질 못하고 결국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 고흥에 이르러 비로소 여덟 봉우리의 실체를 접하게 되니, 왕이 직접 이 산을 찾아와 제를 올리고 ‘팔영산’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팔영산으로 향하던 일행은 황금들판을 배경으로 팔영산이 은은하게 바라다 보이는 명당을 발견하곤 곧장 차를 세웠다. 한눈에 봐도 여덟 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은 것이 바로 팔영산임을 알 수 있다. “거참 독특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추수가 한창인 때를 맞아 황금들판과 겹겹의 산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참으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위왕이 멀리 중국에서 팔영산을 찾았던 것처럼 우리 일행도 그와 같은 맘이 든 것일까. 어서 빨리 팔영산을 찾아 봉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현지 주민의 말에 의하면 팔영산의 봉우리를 하나하나 넘을 때마다 절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무사히 잘 넘게해줬기 때문일까. 그만큼 봉우리를 넘는 것이 험난하고 어렵다는 이야기일까. 팔영산을 처음 등반하는 사람으로서는 산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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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사에서 바라본 팔영산 전경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는 대동여지도에서 팔영산의 ‘영’자를 ‘신령할 영(靈)’으로 표기해뒀다. 여덟 봉우리에 깃든 신령한 기운을 느껴서일까.

팔영산의 봉우리는 각각 이름이 붙여져 있다. 봉우리는 제1봉인 유영봉(儒影峰)에서 2봉성주봉(聖主峰) 3봉 생황봉(笙簧峰) 4봉 사자봉(獅子峰) 5봉 오로봉(五老峰) 6봉 두류봉(頭流峰) 7봉 칠성봉(七星峰)을 거쳐 제8봉인 적취봉(積翠峰)을 마지막으로 한다.

탐방팀은 탑재에서부터 출발해 제1봉인 유영봉을 거쳐 8봉 적취봉까지 등반하기로 했다. 1봉까지 가는 데는 무리 없이 단숨에 올랐다. 유영봉에 올라서니 다도해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바다 멀리 작은 섬들이 곳곳에 보이고, 해안가를 곁으로 펼쳐진 황금들판의 물결은 바닷물결과 견준다. 하지만 이제 겨우 1봉에 올랐을 뿐이다. 다음 봉우리의 풍경이 더욱 기대된다.


2봉은 성주봉(538m)이다. 성주봉을 오르기 전 안내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져 있다.

성스런 명산주인 산을 지킨 군주봉아
팔봉 지켜주는 부처 같은 성인바위
팔영산 주인되신 성주봉이 여기로세


각종 기암바위들과 절벽, 다양한 봉우리의 모양새를 감상하며 참으로 명산임을 깨닫는 순간 6봉인 두류봉(596m)을 앞두고 섰다.

다른 봉우리에는 철제 계단이 마련돼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두류봉이 제일 험난하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철봉만 의지한 채 기암바위를 올라야 한다. 암벽 등반까지는 아니어도 다리를 있는 힘껏 들어 올려야만 한발 한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그렇지만 오르는 중간 중간 적당한 자리를 잡고 다도해의 풍경과 지나왔던 봉우리들의 모양새를 꼭 조망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찔한 비경을 맛 볼 수 있으며, 더불어 보람도 느낄 수 있다. 한점 바람이 불어올 땐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이 또한 자연이 주는 선물이지 않은가.


건곤이 맞닿는 곳 하늘문이 열렸으니
하늘길 어디메뇨 통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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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산 제8봉인 적취봉에서 바라본 남해의 풍경
 




두류봉을 올라야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두류봉을 거쳐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을 지나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류봉을 올라야 한다. 험준한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이란 분명한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상을 밟기 위해선 현재의 고난 정도는 인내해야 하고, 때론 그 고난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걷는 그 길은 정도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꼼수를 부리려 할 때는 어긋난 길로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감동이란 단순히 시각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만은 결코 아니다. 바로 깨달음이다. 만물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야 말로 자연에게서 또는 천지만물을 지은 창조주에게서 받는 감동의 선물 아니겠는가. 깨달음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고 깊게 새겨진 나만의 것이 된다. 다음 기회에 팔영산을 다시 찾는다면 그 깨달음의 폭이 한층 더해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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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영산 통천문 6봉인 두류봉 통천문을 지나 7봉 칠성봉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