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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만 가지 형상에 감탄사가 절로
대가야 건국신화 서린 가야산 만물상(萬物相)


글 박선혜 사진 김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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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시시각각 다른 옷을 입고,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아~!”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산. 영겁의 세월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기암이 장관을 이루고, 이러한 바위 하나하나가 모여 만 가지 형상을 이뤄 ‘만물상(萬物相)’이라고 불리는 곳.

보는 장소와 각도에 따라 가지각색 풍경을 자랑해 멀리서 보아도 좋고, 가까이에서 보면 더 좋은 만 가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가야산 만물상. 지난 6월 18일, 마루대문 답사팀은 가야산 산신과 천신의 사랑이 빚어낸 아름다운 대가야 건국 신화가 전해 내려오는 가야산 만물상을 장장 9시간에
걸쳐 영상과 사진으로, 그리고 눈과 마음에 고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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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이 산세와 어울려 장관이다. 본지 발행인이 손을 펼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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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만물상의 선바위


가야산 만물상 구간은 가장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한다. 운이 좋아야 전설이 깃든 신비로운 비경을 볼 수 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만물상만  매력을 발산하며 힘겹게 산을 오른 이에게 끝내 미소를 허락한다. 가야산은 대륙성 기후로 기온의 연교차·일교차가 매우 커서 날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여름에는 지형성 강우로 연강수량이 1100ml 이상이며, 하계 집중 현상도 높은 곳이다.

다행히 답사팀이 만물상을 찾은 날은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전날 내린 비로 땅이 약간 젖어 있었지만, 코끝을 스쳐오는 시원한 산바람에 땀 흘릴 겨를 없이 산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야산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암괴석이 산세와 조화 이룬 ‘만물상’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형승(形勝)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海東)에 짝이 없다”고 가야산을 칭송하고 있다.

* 형승(形勝)-지세 또는 풍경이 뛰어남 **해동(海東)-우리나라를 발해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일컫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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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놓인 바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영겁의 세월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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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입 모양을 닮은 바위
 

조선 중기 문신 한강 정구(1543∼1620년)의 <가야산기행문>에는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仁者)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自省)하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정구 선생은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 년 처사의 마음, 말 없는 가운데 합하네”라고 읊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10대 명산에 속하는 가야산에서 최고의 능선이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만물상.

만물상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산세와 어울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규모부터 남다른 수많은 사람 형상 바위, 동물 형상 바위 등이 산세를 더욱 웅장하게 만든다. 이 기암들이 없는 만물상은 상상조차 안 될 정도다.

만물상 구간(백운동탐방지원센터~상아덤, 2.8㎞, 2시간 20분)은 초입부터 경사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큰 오르막과 내리막을 일곱 차례 반복해야 하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다행히 이곳 바위들은 대체로 둥그스름한 형태를 띤다. 네모 형이라도 결코 뾰족하지 않다. 그만큼 날씨와 체력만 잘 받쳐 준다면 오를 만한 산이 성주팔경 중에 제1경인 만물상이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는 산이라지만, 녹음(綠陰)이 짙은 여름에는 그 많던 바위가 수풀에 숨었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답사팀이 오른 만물상은 참으로 오를 만한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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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산 정상에 가까워지면 바위틈에 자란 야생 식물, 고수목 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바위틈에 뿌리를 내고 자라난 질긴 생명력에 경이로움 마저 느껴진다.

기독교 경서인 성경에서 신약 로마서 1장 20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기록돼 있다.

기자는 만물상을 오른 순간 창조주가 만든 만물 앞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나약함을 느꼈다. 대자연 앞에 서니 어느새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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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의 가야산에 운무가 끼어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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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만물상 정상의 상아덤(여신이 사는 바위)
 


가야산 여신과 하늘신이 만난 ‘상아덤’

가야산은 대가야국의 시조설화가 서려 있는 산이다. 예부터 *해동(海東)의 10승지 또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특히 만물상 정상인 ‘상아덤’에는 가야산 여신인 산신(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 신인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가 노닐던 곳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상아덤의 어원은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말이고, 덤은 ‘바위’를 지칭해 ‘여신이 사는 바위’라는 의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최치원이 저술한 <석이정전>에 상아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백성들이 가장 우러러 믿는 여신이었다.

* 해동 10승지(정감록에 기록)-풍기 예천,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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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모주는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 마음먹고 큰 뜻을 이룰 힘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천신 이비가지는 어느 늦은 봄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에 내려앉았다.

정견모주와 이비가지는 상아덤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이후 옥동자 둘을 낳았다.

첫째는 아버지인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붉었으며, 아우는 머니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그래서 첫째는 ‘뇌질주일(惱窒朱日)’, 둘째는 ‘뇌질청예(惱窒靑裔)’라 이름 붙였다.

후에 첫째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됐고, 둘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됐다.

답사팀이 상아덤에 오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답사팀을 반겨주기라도 한 것일까. 상아덤 앞에 다다르자 처음 느껴보는 신비로운 바람결이 온 몸을 스쳤고, 우리는 높은 산 위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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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고분군
 

고령 중심의 대가야, 독자적 문화 형성 대가야국(大伽倻國)은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이비가지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뇌질 주일이 42년경 경북 고령(高靈)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알려졌다. 뇌질주일(또는 내진주지)은 대가야를 세우고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됐다.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약 520년 동안의 찬란한 역사를 이어온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을 앞세워 공격해오면서 멸망했다.

하지만 대가야는 멸망하기 전까지 정치·문화 영역에서 가야 중의 최전성기를 이끈 나라다. 순장문화, 철기문화, 가야금, 토기 등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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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이 늘어선 곳에 핀 참나리
 

6세기까지 대가야의 도읍지로 번성을 누렸던 고령(高靈)은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가야산이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높을 고(高) 신령할 령(靈). 지명 자체만 봐도 신령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양반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불렸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고령에서는 흉년이 들어도 최소 80말은 나온다’고 기록될 정도로 토양은 비옥했고, 물은 충분했다.

특히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이 발굴되면서 묻혀 졌던 가야사가 드러나게 됐기 때문이다.

대가야인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내세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죽어서도 지금의 삶이 그대로 연장된다고 믿었던 대가야인들은 많은 껴묻거리를 시신과 함께 묻었다.

순장(殉葬)도 행했는데, 순장이란 물건을 껴묻는 외에 한 집단의 지배 계층에 속한 인물이 죽었을 때 그 뒤를 따라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하위계층의 사람을 같이 묻는 행위다. 이러한 풍속은 결국 피장자가 죽은 뒤에도 생활이 지속된다는 내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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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모조품)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의 왕, 왕족, 귀족, 통치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망루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한다.

왕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부장품을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곳차곳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다.

대가야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유물이 많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고분이 온전한 채로 눈에 띄어 95% 이상이 도굴됐기에 찬란했던 대가야의 역사가 신라보다 많은 부분 감춰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나마 대가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산동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 토기 등의 껴묻거리는 도굴꾼이 미처 캐내지 못하고 남은 유물의 일부다.
고령읍 주산(해발 321m)을 중심으로 남쪽까지 능선을 타고 분포한 고분은 현재 704기로 확인됐다. 남북을 통틀어 가장 많은 고분이 분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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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고분 축조 모습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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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두(羊耳頭) 형상의 가야금
 


가야금 ‘소리’로 흩어진 7개 가야 통일 염원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가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달라 소리음(聲音)을 하나로 하기 위해 성열현(省熱縣) 출신의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곡 12곡을 만들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는데 위판은 하늘을, 밑판은 땅을 상징하며, 중간에 빈 공간은 사람이 사는 삼라만상을 뜻한다고 한다. 12줄은 1년 즉, 12달을 의미하는데 1600년 전 이미 12달을 뜻하는 12줄을 생각해 냈다는 것은 분명 문화를 앞서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금의 머리는 양이두(羊耳頭) 즉, 양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륵과 가실왕은 대가야 551년 국운이 기운 때에 왜 가야금을 만들었을까. 가실왕은 흩어진 7개 가야를 소리로 통일해 보고자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곡을 쓰라 명했다. 즉, 가야금은 소리로 통일을 이루려는 가실왕의 염원이 담긴 악기다.

우륵은 185곡을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12곡의 가사만 남았다. ‘하가라도’ ‘상가라도’ 등 2곡은 불교가사이며, 나머지 10곡은 지역이름이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혁(爾赤欠) ▲상기물(上奇物)이다.

한편 가실왕은 일반적으로 대가야의 왕으로 보고 있는데, 두 가지 설이 있다. 대가야의 왕중에서도 우륵이 대가야 멸망 직전의 인물임을 들어 대가야 마지막 왕이었다고 보는 설과, 479년에 중국 남제(南齊)에 조공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은 바 있는 하지왕(荷知王)으로 보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