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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무등산

참된 광복光復을 꿈꾸며 도약하는 나주

신록新綠이 내려앉은 무등산


글 이경숙 사진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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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금성관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지방의 궁궐(왕의 상징)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즉 알면 참으로 보인다.’ 호남의 중심으로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남 나주(羅州)를 탐방하며 떠오른 말이다. 관심을 가지고 알면 알수록 나주에 깃든 역사적 의미들을 참으로 깨닫게 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금성산(錦城山)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 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나주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나주를 일컬어 ‘작은 한양’이라는 뜻으로 소경(小京)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주는 비단 지리적 특성만 서울을 닮은 것이 아니다. 금성관·목사관아·나주읍성·나주향교와 영산강 유역의 고분군 등은 한 때 나주가 경제·정치·문화적으로 상당한 권위를 지녔던 천년고도(天年古都)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눈부신 초록의 짙푸름이 온 산을 뒤덮는 6월, 탐방팀은 4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나주로 향했다. 새로운 곳을 향하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설레기만 하다. 하지만 이번 탐방만큼은 설렘과 동시에 뭔지 모를 긴장감이 여행자의 모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나주의 금빛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을 찾아 함께 발걸음을 재촉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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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나주 느러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영산강 한반도 지형

 


나주인의 젖줄 영산강 그리고 천년고도 나주

나주의 젖줄인 영산강은 전남 담양군에서 발원하여 광주시를 거쳐 나주와 영산포를 휘감아 돌아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영산강은 유역면적 3371㎢, 길이 115.5㎞로 한강·낙동강·금강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강 중 하나이며, 중류지역인 나주와 영산포를 굽이져 흘러 기름진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곧 호남 최대 곡창지 나주평야다. 영산강은 본디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에서 이름을 따와 금천(錦川)·금강(錦江)이라 불렸으나, 신안군 영산도 사람들이 잦은 왜구의 침략을 피해 나주 근처에 개척했던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을 영산강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

나주 영산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인류문명의 중심을 이루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 유학생들이 입국하던 국제포구가 나주 회진이었을 만큼 당시 국제 도시로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또한 나주인들은 영산강을 통해 중국·일본 등 동남아시아까지 교류를 넓히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렇게 나주는 영산강과 드넓은 곡창 지대 나주평야를 바탕으로 경제·정치·문화 등에서 뛰어난 성장을 이루며 호남의 중심지로 급부상한다.

고려 성종(983년)은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에 12목(牧,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외관을 파견해 통치했다. 나주목은 그 중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권위를 유지하며 천년고도의 반열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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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문 나주읍성 4대문 중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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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문 나주읍성 4대문 중 하나로 남고문이 가장 많이 이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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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 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나주를 설명하고 있다. 금성산은 한양의 삼각산과 비슷하고, 영산강은 한강과 같으니 이러한 나주를 일컬어 ‘작은 한양’이라는 뜻으로 ‘소경(小京)’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주는 비단 지리적 특성만 서울을 닮은 것이 아니다. 나주는 중요 도시로서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지방의 궁궐’이라 불리는 금성관(錦城館)을 지어 그 권위와 위상을 자랑했다. 금성관에서는 매월 1일과 15일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왕께 충성을 다짐하는 ‘망월례’가 치러지기도 했다. 금성관 현판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제법 크게 제작돼 금성관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그 아래서 잠시 눈을 감고 ‘충성을 다짐하던 관리와 선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군주(君主)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나주읍성을 굳건히 지켰으리라, 그것이 그들의 태산 같은 자부심이 됐으리라 짐작해 본다. 오늘에 이르러 금성관은 나주인의 항일정신을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이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킬 때 금성관 망화루 앞에서 출병식을 가졌으며,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후 그 빈소가 이곳에 마련돼 나주인들의 항일정신을 고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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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향교 한국에서 가장 큰 향교로,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해졌다.


나주읍성은 나주목의 행정 관아가 즐비했던 곳으로 읍성 길이는 3.7㎞가 넘고 내부 면적은 약 99만㎡(30만평)에 달한다. 나주읍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동점문·서성문·남고문·북망문 등 4대문이 있으며, 현재는 북망문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된 상태다. 이 4대문 또한 과거 주요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전라도의 명칭은 전주와 나주에서 비롯됐다. 이 역시 전남도 최대 도시가 바로 나주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나주에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다. 바로 나주 향교다. 한양의 성균관 다음으로 규모가 큰 나주향교는 유학과 예절을 가르치던 교육의 산실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이 곳 향교는 벼슬에 진출하기 위한 지식적인 가르침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도리와 인성·예절에 대한 가르침이 늘 함께했다.

나주의 곳곳을 둘러보니 과연 천년고도로서의 그 영화(榮華)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주인의 한(恨), 곧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19세기 지구촌 곳곳에 있는 약소국들은 서구 열강들에 의해 나라와 주권을 빼앗기며 제국주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 아프고, 억울하고, 한 맺힌 대한민국의 암흑기 ‘일제강점기’. 일본은 대한민국을 불법 침략해 많은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한국인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았으며, 학생들의 꿈과 배움의 기회를 강탈했고, 민족성과 언어를 말살시키려 했다. 나주 역시 일제의 칼날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일제가 할 퀴고 간 상흔 없는 곳이 대한민국 땅에 어디있겠는가 마는 나주의 상처는 더욱 깊어 보인다.

1897년 10월 개항된 목포항은 호남의 관문으로서 서해와 내륙의 물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일제는 목포항을 통해 영산강 수로를 따라 나주평야가 자리한 영산포를 강제 점령한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나주와 영산포에 금융조합, 동양척식주식회사, 나주 역사, 경찰서, 영산포등대 등을 설립한다. 이 건축물들은 지금도 나주와 영산포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본은 당시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여지는 곡물을 대량으로 약
탈해 갔으며, 일본인들은 나주와 영산포 일대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대지주가 되어 경제적 부를 축척했다. 반면 한국인들은 양식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이었던 토지를 약탈 당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나주 땅을 버리고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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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영산포구 사진 한 가운데 보이는 등대는 내륙에 세워진 유일한 등대로 일제 당시 영산포가 호남지역 수탈의 거점이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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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산포는 영산강하구둑이 건설되면서 뱃길이 끊어진 상태다. 영산포일대는 홍어거리가 들어서 있고, 근대문화 거리가 조성돼 있어 일제 때 지은 창고·가옥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영산포 마을주민들은 예전엔 일본 건물들이 여기저기 많았지만 지금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화재적 의미가 있는 일제 건축물들은 근대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문화재 등록이 예고돼 있어 나주시청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지정된 근대문화재들은 분명 일제의 잔재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보존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아픔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하고, 이를 거울 삼아 다시는 그 설움과 아픔을 겪지 않도록 후대에 교훈으로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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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 쿠로즈미 저택 일제강점기 나주지역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쿠로즈미 이타로가 살던 집. 1905년 영산포에 도착한 쿠로즈미는 1930년 논, 밭 등 총 1098정보를 소유해 나주에서 제일가는 지주가 되었다. 2.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일제는 나주평야에서 수확되는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1909년 영산포에 영산포지점을 설립했다. 현재는 토지수탈의 본거지였음을 알려주는 붉은 벽돌로 지은 문서고만 일부 변형되어 남아 있다. 3. (옛)나주경찰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우리 국민을 억압하고 민족운동가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행했던 곳으로, 당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고 있다. 4. (옛)금남금융조합 1907년 7월에 설립한 조합으로 나신·영산·금천·왕곡·세지·다시·문평·삼도의 일부와 노안 등 9개면에서 참여했다. 해방 이후 잠시 동안 나주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나주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일본인은 빼앗고 한국인은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현장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장소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주에서 광주를 오고갔던 학생들의 통학 열차 칸이다. 좁디 좁은 공간 안엔 모든 것을 빼앗고 스스로 우월함을 자처했던 일본인 학생들과 일제에게 배움의 기회도, 꿈도, 토지도, 식량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 학생들이 함께했다. 1929년 10월 30일 마침내 폭탄 심지에 볼꽃이 튀는 사건이 나주역에서 발생한다.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와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를 지켜 본 한국인 학생 박준채는 “명색이 중학생이면서 여학생을 희롱하느냐”며 일본인 학생을 꾸짖는다. 이에 일본인 학생은 “조선인 주제에…”라는 불손한 말로 한국인 학생들을 격분시켰고 이에 싸움이 크게 번지게 된다. 이는 11·3 학생독립운동의 불꽃이 되었다.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히고 있는 11·3학생독립운동은 그 주역이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독립운동과 차별성을 갖는다.

일본이 영산포에 건설한 철도와 수로를 통해 모든 것을 약탈해 가는 현장을 똑똑히 봐왔던 학생·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시 죽림동에 자리하고 있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이에 대한 자료들을 잘 정리해 기념관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역사적 사건들을 꼼꼼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오랜 세월 나주는 영산강과 운명을 함께했다. 영산포의 번성으로 영화를 누렸고,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쇄락이라는 아픔을 맛봐야 했던 나주인들의 삶. 견훤과 왕건은 나주를 서로 점령하기 위해 격전을 펼쳤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목숨 걸고 호남지역을 수호했다. 이는 나주가 우리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주는 다시 한 번 찬란했던 영예를 회복하기 위해 ‘빛가람 혁신도시’를 내세우고 있다. 곧 진정한 광복(光復)이 나주 땅에 깃들길 기대해 본다.


눈부신 초록이 물든 전남 무등산에서

강한 햇살은 신록(新綠)을 더욱 눈부시게 만든다. 초록의 아름다움의 극치, 초록의 짙음이 형형색색의 꽃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말한다면 거짓을 고한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을까. 6월 무등산(無等山)에 싱그런 신록의 계절이 찾아왔다.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북구와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은 1187m다. 무등산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기고 싶어도 매길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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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에서 내려다본 광주시내 전경
 


통일신라 때에는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警異)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 이양하 수필 ‘신록예찬’ 中에서 -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무등산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허락하지 않아 조선 건국 후에 벼슬을 받지 못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마음 먹은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전국의 산천신(山川神)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도와 줄 것을 빌었다. 하루는 무등산에 올라 무등산신에게 허락을 받으려 했으나 무등산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신에게 매정함을 느낀 이성계는 하산하던 중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찰나, 때마침 어떤 사람이 보자기에 먹을 것을 싸 와 이성계를 대접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이성계는 식사를 대접한 이에게 누군지 물었다. 식사를 대접한 그는 담양에 사는 왕 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집안이 곧 멸망할 것을 알고 걱정하다 말까지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가 가던 날 밤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초행길에 가져가기 위해 장만한 음식을 싸 들고 무등산을 올랐다. 그는 이성계가 무등산에 오를 것을 미리서 알고 때를 기다려 만난 것이다. 그는 이성계에게 자신은 왕 씨이며, 어떻게든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이성계는 그에게 ‘임금 왕(王)’자 위에 ‘사람 인(人)’자를 얹어 성씨를 삼으라며 전씨(全氏)로 사성(賜姓)하였다. 그 덕에 조선이 건국된 후 멸족을 면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무등산 전설은 부당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무등산은 중생대(약 7500~6400만년 전) 화성암 산지로서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465호, 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쪼개지도록 암석 내에 발달한 크고 작은 갈라진 틈)가 발달돼 장관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등산길을 따라 장불재(해발 900m)에 다다르니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듯 탁 트인 광경이 모든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 주는 듯하다. 장불재 고갯마루를 지나던 바람도 잠시 머물며 오르는 내내 흘린 등산객들의 땀을 시원스레 닦아준다.

광주시는 무등산을 어머니 품으로 빗대어 말한다. 장불재에 오르니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표현이 적격임을 깨닫게 된다. 광주시를 가슴으로 끌어 안 듯 품고 있는 무등산 줄기의 모습이 마치 그러하다. 정상 부근의 완만하고 평평한 모습 또한 거부감이 없으면서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안정감과 평온함을 선사해 주니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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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장불재 표지석을 마주하고 왼편으로는 입석대와 서석대가 보이고, 뒤편으로는 낙타봉의 백마능선이 건너보인다. 백마능선 일대는 억새가 널리 분포해 있어 장관을 이루며, 매년 가을에 열리는 ‘무등산 갈대제’ 축제가 유명하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무등산의 대표적인 주상절리로 많은 등산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입석대(해발 1017m)는 ‘선 돌’이라는 뜻으로, 멀리서 신록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 한 폭의 그림이요. 가까이서 보면 웅장한 신전(神殿)과도 같다. 돌기둥 위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또 하나의 돌기둥. 어떻게 버티고 섰을까 생각해 보지만 입석들은 몇 만 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끄떡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우뚝 서 있다. 자신을 빚어낸 조물주를 향한 충성심 때문일까.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 있는 기암괴석들을 보니, 신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든다.

입석대를 지나 서석대로 오르는 길에선 기암바위들과 아직 지지 않은 봄꽃들이 서로 어우러져 탐방팀을 맞아 주고 있었다. 나무들은 사람 키보다 작아 주변의 풍경을 가리지 않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서 있는 서석대(해발 1050~1100m)는 그 모양이 마치 주변을 둘러친 병풍과도 같은데, 해질녁 노을이 서석대를 비추면 마치 ‘수정처럼 빛이 난다’하여 ‘수정병풍’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서석대 전망대에선 광주 시가지와 멀리 월출산을 한번에 조망할 수 있다.

무등산… 과연 비할 데 없어 그 등급을 매길 수 없음에 붙여진 이름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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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