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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진도에서 마주한 감동
기암절벽이 만든 월출산,
승리를 안긴 울돌목
 
 
실로 삼고초려 끝에 월출산은 길 문을 열어줬다. 스모그와 주능선 결빙, 비가 길을 막더니 결국 세 번째 산행 끝에 월출산의 맑은 얼굴을 보게 됐다. 원래 명산은 쉽게 오르길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단풍 절정 시기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지만 월출산은 꽤 포근한 모습으로 답사팀을 맞이했다.

 
글 이지영 사진 김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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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 사이로 달이 뜨는 곳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에 둘러 위치한 월출산은 여느 국립공원처럼 매우 청량하고 깨끗했다. 몇 번의 기다림 끝에 오르게 된 터라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허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몇 걸음 옮기는가 싶더니 순간, 아차 싶었다. 월출산은 기암괴석이 가득 들어찬 악산(惡山)으로도 이름이 높다. 초입부터 속도가 영 나질 않더니 곧 코에 닿을 것 같은 급경사가 나타났다. 신령한 바위라는 뜻의 영암(靈巖)마을 뒤에 병풍처럼 쳐진 월출산의 절경은 빼어나다. 영암이란 이름이 우연이 아닌 듯,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월출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며 아름다운 산세와 풍광으로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전국 3대 돌산 중 하나답게 옹골찬 기개가 살아있다.
 
월출산 암봉들이 그려내는 선이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늦가을 무렵의 월출산. 대기가 청명해지면서 주위의 암봉들이 더 가깝게 당겨 앉는 때이기도 하다. 월출산의 능선에서는 시선을 가리는 것들이 전혀 없다. 암릉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펼쳐지는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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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진) 월출산의 명물이라 불리는 구름다리는 1200명의 인력이 투입돼 2006년 새로 시공됐다. 절벽 높이가 무려 120m나 된다.
(작은사진) 월출산의 해발고도는 809m다. 이 숫자만으로는 월출산의 웅장함을 짐작하기 어렵다.
 
    
 
답사팀은 월출산의 다양한 기암괴석을 볼 수 있다는 종주구간을 산행길로 정했다. 구름다리 방향 철계단을 지나 사자봉에서 월출산의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峯, 809m)으로 통하는 이 길이 좀 험하긴 해도 월출산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하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월출산의 구름다리가 우리나
라 산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기자를 포함한 일행은 구름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새로 놓은 다리여서 흔들림이 덜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자와는 달리, 어떤 겁 없는 등산객은 구름다리가 예전처럼 흔들거리는 묘미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아찔한데 말이다.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봉으로 향하는 철계단을 만나는 순간 좀 전에 느꼈던 안도감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왜 이렇게 가파를까”하고 계단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과연 바위들의 천국다웠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이런 바위 절벽에 거의 90도에 가까운 계단을 세웠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며, 새삼 거칠 게 없을 것만 같은 인간의 한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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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오순도순 모여 있는 것 같다는 ‘육형제 바위’. 월출산을 보는 것은 어찌 보면 수석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시야의 각도를 조금씩 달리할 때마다 수많은 암봉의 모양은 달라진다.
 
 
 
가파른 철계단 꼭대기에 올라 지나온 봉우리들을 내려다보니 거인이 하나 서있는 것도 같고, 바위를 뒤집어쓴 사자가 앞발을 내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물론 대체로 다 사람처럼 보여 이 험산준령에 어인일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나 싶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도서관에 책이 꽂혀있는 모습 같아 책바위, 형제가 오순도순 모여 있는 것 같다하여 육형제바위 등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있는 바위도 많다.
 
월출산의 진수는 기암괴석이 만들어낸 거대한 능선 위에 달이 뜬 모습이다. 그래서 이름도 ‘달이 뜨는 산’ 월출산(月出山)이다. 서쪽 아래 구림마을에서 보게 되면 사무치게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산수를 찾아 방랑한 조선시대 생육신 김시습은 그 모습을 두고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고 노래했다. 답사팀의 일정상 직접 볼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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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 <운림산수도>
 
 
 
사자봉에서 천황봉으로 가는 구간은 아래서부터 위로 쭉 타고 올라가는 능선이 아니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아무리 가도 천황봉은 저 멀리 있고 고개타기를 반복해 지쳐갈 때쯤, 눈앞에 마주한 바위와 수목들이 마치 산수화 한 폭을 펼쳐놓은 듯 나타나 힘을 돋웠다. 천황봉을 백여 미터 앞두고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通天門)이 우리를 맞았다. 천황봉에 이르는 문(門) 역할을 하는 이 통천문은 월출산 최고봉을 지나 하늘로 통하는 높은 문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비롯됐다. 이름 값을 한다는 말처럼, 과연 통천문은 하늘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 것만 같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천황봉에 다다르니 광활한 영암 평야와 아름다운 월출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남에서 참 아름다운 산과 인연이 닿은 날이다.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을 만나다
 
영암을 떠나 한국 남종화(南宗畵)의 고향이자 진도 그림의 출발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았다. 운림산방은 남종화(남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1809~1893) 선생이 49세 되던 해 고향 진도로 돌아와 마련한 거처이자 화실로 진도군 의신면 첨찰산(尖察山, 487m) 아래 자리해있다.

소치 선생은 이곳을 두고 “마음이 스스로 기쁘고 내 성품에 맞다”고 말하며 첨찰산의 여러 봉우리들과 계곡, 마을 등에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을 붙이는가 하면 운림산방 주변 풍경을 골라 ‘운림10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학정봉의 흰 구름, 옥계수에서 갓끈 씻기, 청하곡의 풀피리 소리, 경담 연못 속에 노는 고기, 귤원의 가을향기, 벽오강에 깃들이는 새들, 쌍계사 저녁 종소리 등이 ‘운림10경’이다.

답사 일행을 맞은 운림산방은 수려한 경치를 끌어 앉아 홀로 잠잠한 듯했지만 허련 선생이 전라도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중앙 문인화의 대가가 되기까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진도는 옥주(沃州)라는 옛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처럼 땅이 기름진 탓에 남자들이 험한 뱃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 진도에서 예술적 취향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환경 덕분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진도는 ‘유배지 문화’를 꽃피운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였다. 허련 역시 역모죄로 몰려 진도에 유배된 임해군의 처조카 양천 허대의 후손이다.

허련은 28세 때 당대 최고의 학승인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를 찾아간다.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있어 최초의 스승이자 그가 출세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은인이다. 특히 초의의 보증으로 가사문학의 대가 윤선도(尹善道) 일가의 ‘공재화첩’을 보게 되는데 이 화첩을 통해 소치는 그림을 그리는 데 법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일생에 있어 또 한 번 큰 인연을 만나게 되니 바로 추사(秋史) 김정희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의 눈에 들게 된 허련은 32세 늦은 나이로 서울에 상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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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의 ‘운림 10경’이 살아있는 운림산방의 전경. 이곳은 허련의 3남 미산 허형과 손자
인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다. 1982년 손자 허건에 의해 지금과 같이 복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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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된 허련은 추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는 극찬을 듣기에 이른다. 김정희가 허련에게 제시한 지향점은 신운(神韻)의 경지였고 이는 문인화의 본질에 가까이 가는 심오한 화풍이었다. 실제 모습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슴속의 이상과 의지를 반영해야 하므로 학식과 이론이 겸비되지 않으면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힘든 수련의 과정이었지만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충실한 제자였고 그 가르침에 한 점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됐을 때에도 9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찾아가 뒷바라지를 한 것은 허련에게 추사가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제주도는 바닷길로 9백리에 달하는 거리였고 거룻배로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기에, 허련이 스승을 위해 세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허련은 김정희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지 10년 만에 인생 최고의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에 다섯 달 동안 헌종을 배알하여 왕이 직접 내린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지방 출신 화가를 왕이 여러 차례 독대하고 직접 붓을 건네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로 기억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허련은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과 민승호(閔升鎬), 김흥근(金興根), 정원용(鄭元容),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민영익(閔泳翊) 등 유명 인사들과 교유(交遊)하기도 했다. 그가 살던 19세기는 조선왕조 양반정치 체제가 무너지고 쇄국에서 개항으로 넘어가는 등 전통의 마지막 세기였다. 바다가 육지로 변한 것처럼 달라지고 있다고 할 만큼 격동의 시기였음에도 그는 평생 사대부 지향적인 삶을 추구했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오로지 남종화로 일관했다. 허련은 그림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시서화(詩書畫)에 모두 능했다. 다산 정약용의 장남 유산 정학연은 그를 ‘삼매(三昧)에 이른 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특히 허련은 허모란(許牡丹)이라 불릴 정도로 모란을 즐겨 그렸는데 ‘괴석모란도’에쓴 그의 시를 소개한다.

“달처럼 아름답고 눈처럼 흰 꽃 봉우리 향기로운 모란 속에 구름이 들어 한밤에 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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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가장 작은 이순신 동상이며, 유일하게 평상복을 입고 검이 아닌 지도를 들고 있다. 밀물시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도록 제작되었다.
 
 
명장 이순신, 그의 고뇌를 느끼다

저 멀리 진도대교 옆으로 바다를 향해 손을 뻗어 호령하는 이순신 동상이 보인다. 답사 일행의 마지막 코스는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이다. 울돌목은 행정구역상으로 해남군에 속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위치해있다. 영화 <명량>으로 요즘 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울돌목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띤 것은 큰 배가 빠르게 진도대교를 통과하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큰 배가 참 빨리도 간다 싶어 물 가까이 가서보니 이해가 갔다. 물살이 정말 빨랐다. 꽤 포근한 날이었음에도 물살이 일으키는 바람에 한기가 절로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蕪瑚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호남이 뚫려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호남 방어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한산대첩 역시 호남을 빼앗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의 공격루트를 막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으며, 명량대첩 역시 호남이 뚫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치러진 대결전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위기 앞에 가슴 조이며 고뇌하던 인간 이순신. 숱한 모함과 핍박과 고난 속에 몰래 눈물 흘려야 했던 시간들을 뒤로한 채 그는 또 다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뇌를 멈추지 않았다.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며 전설이 된 명량해전. 그 누구도 이길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고뇌했던 장군의 간절함을 하늘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 하늘이 그에게 울돌목 해협의 지리적 요건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한 것은 아니었을까.

‘남해에서 서해로 흘러들어오는 조수는 병 주둥이처럼 생긴이 좁은 해협을 만나 유속이 급격히 빨라진다. 가장 깊은 수심은 20m, 물길은 동양 최대 유속인 11노트다. 하루 네 차례들고 나는 빠른 물살은 좁은 해협과 깊은 해구의 절벽에 부딪치며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쳐 회오리친다. 이 회오리치는 소리는 20리(7.8km) 밖에까지 들리고 물길은 약 3미터에 이른다. 이러한 원리로 ‘물이 울면서 돌아가는 곳’이라 해 울돌목, 즉 한자로 명량(鳴梁)이 된 것이다.’

왜선은 원거리 항해가 용이하게 만들어진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었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좁은 해협에 모여 있으면 배의 기동이 쉽지 않다.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매우 튼튼하고 높고 넓은 갑판 덕분에 포를 구사하기에 적합했으며 일본의 배보다 훨씬 높아 그들의 특기인 백병전이 통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명량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아예 갑판을 철갑으로 덮어버린 구조가 거북선이라 볼 수 있다.
 
1597년 9월 16일 아침, 왜선이 까맣게 몰려왔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적군의 배는 330척이었고 아군의 배는 대장선을 제외하고 12척에 불과했다.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적군의 배들을 바라본 배안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질리는 기색이었다고 한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순신의 대장선은 함포가 불을 뿜고 불화살과 조란탄을 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머지 조선함대는 적을 보는 순간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 이순신 대장선만이 홀로 싸우고 있었다. 초요기를 보고도 먼 바다에서 관망하여 진격하지 않는 제장들의 배를 본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허나 울돌목의 조류는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방향을 바꾼 조류는 협수로에서 불규칙하게 흐르면서 왜군의 전선을 순식간에 붕괴시켰고 조선 함선의 마지막 일격으로 선두 제대가 궤멸되자 왜군의 후속 함대는 퇴각을 명령했다.

목숨을 바친들 지키지 못하면 소용없으니, 살 길은 오직 승리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전후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45개의 해전에
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렇게 명량을 지켜낸 이순신은 나아가 왜군을 동쪽으로 밀고가 노량에서 아군 83척(청군 지원 포함)으로 왜군 200여 척을 격침시키며 일본을 완전히 물러가게 했고, 7년 임진왜란은 끝을 맺는다.

녹진 앞바다의 큰 이순신 동상 건너편에는 칼 대신 지도를 들고 깊은 시름에 잠긴 작은 이순신 동상이 서 있다.

큰 동상은 웅장한 모습으로 백전불태하는 장수의 모습이, 작은 동상은 나라의 생사를 두 어깨에 지고 남모를 눈물을 흘렸을 인간 이순신이라는 두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외롭게 고뇌하며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의 뒷모습이 417년 전 장군의 그 애타는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울음의 바다 울돌목은 그 마음을 대변하는 듯 포효하고 있다. 명랑을 지켜낸 그 날 아침 조선수군의 승리의 함성도 함께 들려오는 듯하다.